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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습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의 찬란한 현재와 꿈결 같은 미래에 도취된 나머지 그 과거까지 ‘획득’하려 듭니다. 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던 그 과거를 쫓던 남자의 눈은 질투심에 멀고 결국 그 못난 혀를 놀리고 맙니다. 여자의 과거에 관해… 그러자 여자는 되묻죠. “그래서 넌 그 얘기를 믿어?” 지질하고도 안타까운 그 사랑의 종말입니다. 사랑이 그렇다면,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파커는 파이입니까?’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땐 그 끝이 모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다시 얀 마텔의 원작 소설을 찾아보았죠, 사실 평소엔 이런 집요함이 도리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원작보다 못한 영화 혹은 그 반대… 영화와 소설 둘 중 어느 한쪽에서 촉발한 감동을 잃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에 그 둘을 만나는데 조금은 시차를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답을 짐작하며 믿지 않을 이유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한 작가가 조난선의 유일한 생존자인 파이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조난 당시 소년이었던 파이는 어느덧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습니다. 달관이라도 한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작가의 인터뷰에 응해 믿기 어려운 표류기를 들려줍니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지만 파이는 원래 남인도 퐁디셰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퐁디셰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과거를 품어 인도에서도 매우 이국적인 모습을 가진 곳이죠. 그곳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이민을 결심하고 화물선에 오릅니다. 동물원의 짐승들을 모두 배에 싣고 새로운 땅에서 동물원을 열기로 한 것입니다. 첫사랑을 두고 떠나게 된 파이는 안타까운 이별을 경험합니다.

그 이별은 앞날을 예고한 듯합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아득한 바닷길을 헤매던 중 파이 가족을 실은 선박은 큰 풍랑을 맞이합니다. 배는 갑작스레 침몰하고, 탑승 선원 가운데 파이만이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합니다. 살아남아 파이와 함께 구명정에 오른 건 동물들뿐이죠. 다리를 다친 얼룩말,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바나나 더미에 매달린 채 살아난 오랑우탄 오렌지 주스… 그런데 그때 가장 반갑지 않은 생존자가 하나 더 구명정으로 다가옵니다. 사나운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죠.

짐승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얼룩말을 노린 하이에나에게 저항하던 오랑우탄은 하이에나에게 살해되고 하이에나 또한 벵갈 호랑이에게 죽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건 리처드 파커와 파이 둘 뿐입니다. 구조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결코 공존하기 어려울 둘은 표류하며 생존의 사투를 벌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인도에 관한 이야기를 보태면 더욱 흥미로워질 것입니다. 극 중의 파이는 구명정을 방주라고 칭하는데, 실제 인도의 신화 전설엔 (‘노아의 방주’ 유사하게) ‘마누의 방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마누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그가 위기에 빠진 물고기를 구해주는데, 그 물고기가 신(유지의 신 비슈누, 힌두교 삼대 신 가운데 하나)의 화신(아바타르)인 것입니다. 물고기는 마누에게 대재앙을 예고하고 미리 방주를 만들어 놓게 하죠. 그리고 얼마 후 예정한 대로 대재앙이 닥쳐 세상이 리셋되는데, 그때 마누는 일곱 성인 및 세상의 동식물 표본과 더불어 방주에 오르고, 그 방주를 물고기가 이끌어 세상의 높은 곳(히말라야 산)으로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이후 새로운 세상(현 세계)이 시작되고, 인도 사람들은 마누를 현 세계 최초의 인간으로 여깁니다. ‘마누의 법전’에 대해서도 들어보셨을 것인데, 간단히 말해 마누가 정립한 법으로 그것이 발전해 현재 인도 사회의 근간을 이룹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식량이 떨어진 채 힘겹게 표류하던 파이는 바다의 물고기를 포획하고 비슈누 신에게 감사하다며 외칩니다. 방주에 오른 짐승이 실제로는 생존자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우화는 세세하게 인도 사람들의 오래된 믿음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원작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은 스페인에서 태어난 캐나다 작가지만, 인도를 여행한 작가로 몇몇 인도의 흥미로운 면모를 가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도와의 인연이 매우 깊진 않으니 성긴 부분도 없진 않습니다. 특히 극 중 파이가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를 믿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독특한 설정인데, 서구의 개항지였던 남인도에 지역 종교 외에 기독교 또한 전파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교를 믿는다는 건 다소 허구적입니다. 한편 배를 탄 파이의 가족이 채식을 고집하며 주방장과 갈등을 빚는 모습이 나오니 더욱 재밌는 대목입니다. 채식은 다분히 힌두교와 연결되는 면모입니다. 다만 종교를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인도의 흥미로운 면모를 가미하면서도 그 한계성이나 인물의 행위에 대한 제약을 덜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의도든 아니든 그 이전에 멋진 허구의 이야기, 픽션이니까 넘어갈 부분입니다.

이렇듯 작품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결국 영화의 완성도에 주목하게 됩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원작에 더해 다재다능한 리안 감독의 역량이 잘 블렌딩 된 작품입니다. 마치 3개국에서 한 개의 계주 팀을 만들었는데 바통 터치가 예술인 듯합니다. 스페인 출신 캐나다 작가의 인도 주인공 얘기를 대만 출신 감독이 이어받아 참 멋들어지게 완성시켰습니다. 원작의 느낌을 잃지 않되 화면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만 (서양인들에 의해) 같은 동양으로 불려도 불교를 제외하면 중국과 인도는 통할 부분이 거의 없는데, 잔잔한 바닷속을 오가는 물고기처럼 교감이 있었는지 중국인 감독은 그 모든 걸 솜씨 좋게 우려냈습니다. 십 년 간격을 두고 얀 마텔의 원작은 맨 부커상(2002년)을, 리안 감독의 영화는 아카데미 감독상(2012년)을 수상했습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영화. 그 매력 포인트는 역시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의 해석에 있을 듯합니다. 조난 당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한 사람들은 파이에게 질문하고, 파이는 그들에게 한 편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건 힘겨운 표류기지만 인간과 사나운 짐승이 함께 표류한 무척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믿기엔 허무맹랑하기에 사람들은 꾸며냈다는 의심을 품죠.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파이에게 진실을 캐묻습니다. 그러자 파이는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건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버리며 처절한 고통 속에 몸부림쳐야 했던 잔혹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진실일까,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화를 본 전 몹시 궁금했습니다. 사실 이야기의 의미와 진실이 무엇일지 누구나 짐작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궁금한 것입니다. 어쩌면… 비록 제 마음속에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는 리처드 파커가 도사릴지라도, 그럼에도 조금은 더 인간적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진실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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