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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시간은 흐른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이선 호크 <보이후드>



얼마간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무언가 쓰고 싶었지만 망설였습니다. 사실 지금도 나른해진 표정으로 좋다는 말밖엔 딱히 더할 건 없습니다. 가끔 너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연처럼 다시 마주친 사람에게도 그랬듯 말이죠. 그렇게 기회를 놓치고는 전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미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예쁜 아이들이 있을 거야.’라고 말이죠. 소심한 자의 자기 위안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 생애 둘의 이야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아무쪼록 말문이 막힌 것입니다. 


<보이후드>는 어쩐지 꼭 그런 기분입니다. 좋은데 딱히 무언가 덧붙이긴 싫습니다. 아주 형편없으면 논외로 여길 때가 있지만, 그 상태 그대로 충분히 좋아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기억 속에 인이 박혀버린 어느 전설적인 광고처럼,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입니다. 그렇다고 완벽하다고,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오히려 한 아이가 성장하기까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다루는 만큼, 그 이야기도 불안정합니다. 대신 관객마저 뿌듯해지는 기분 좋고 따스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도 많은 드라마들처럼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었습니다. 보통의 성장기와 달리 12년에 걸쳐 실제 소년의 성장을 카메라로 담은 것입니다. 풀밭에 누워 하늘을 공상하듯 바라보던 조그만 꼬맹이가 실제 성년이 되어 홀로 독립하기까지를 보여주니, 부모, 형제, 친구도 그 시간의 흐름에 따릅니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닙니다. 소년의 성장에 따른 큰 줄기의 이야기가 있고, 배역을 맡은 어른들도 따라 늙습니다. 독특한 설정의 실험적인 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과 주연 이선 호크는 <비포…> 시리즈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흥미로운 작업을 해냈습니다. 장기간의 일들을 요약하며 담기에 완성된 영화 자체도 한목에 몰입하여 볼 수는 있어도 최근 상업 영화에 비해 상당히 긴 편입니다. 또 어떤 짧은 기간의 극적인 사건을 다루는 건 아니므로, 잔잔하고 차분합니다. 



길고 잔잔하다니, 제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저는 끝끝내 1 권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허구 헌 날 스완네 집 쪽으로… 가다가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면에선 <보이후드>도 처음으로 보기 전까지는 조금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길다고 어렵고 지루하다는 건 역시 제 편견이자 지례짐작이었습니다. 우연히 한 밤 중에 용기를 내어 보기 시작한 이 긴 영화는 제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큰 사건 사고 없고 극적 긴장감이 조성되지 않는 잔잔한 스토리인데, 한 순간을 놓치기 아깝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명작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이고, 작품에 대한 무게 달기를 떠나 상당히 맑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배시시 웃다가 찔끔 눈물을 흘리며 끝내 감동에 빠집니다. 어쩌면 인생 영화란 이런 영화를 뜻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 또 이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역시 다면적 공감대를 갖춘 까닭일 것입니다. <보이후드>를 통해 누군가는 소년, 누군가는 소년의 아버지, 또 누군가는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함께 공감합니다. 함께 성숙해가는 걸 느낍니다. 감정 이입을 해도 각자 극 중 인물 중 하나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의 성장을, 누군가는 아버지의 성숙을, 또 누군가는 강인했던 어머니를 떠올릴 것입니다. 소년 한 명에 몰입해 봐도 비슷합니다. 스스로 소년과 함께 늙어가거나, 가까운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지난 추억을 되새겨볼 것입니다. 전 문득, 책상 아래 누워서 우주선을 조종하는 공상을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책상 위에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관점에서 이 영화가 선사하는 무언가의 온기를 가슴 깊게 느끼고 마음에 품게 되리라 믿습니다. 뛰어난 예술성이 발휘된 작품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로의 예술, 흐름대로의 아름다움이 발현된 영화로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 소화가 덜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이 영화를 곱씹어 볼 생각입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이 영화가 왜 좋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해내기엔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정해진 원칙과 유행에 따른 세상의 이야기에 지칠 때면 이 영화를 되돌아볼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그럴 땐 다시 한번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손실로 가공되는 것이 영화 속 이야기지만, 어쩔 땐 가급적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게 더 제대로 된 이야기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불성설이지만, 아마도 그건 더 진짜 같다는 느낌, 자연스러움 때문이리라 생각해봅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인위적이지 않은 감동.  

십여 년이 걸린 소년의 성장기가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그 감동이 무척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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