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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만나지 못할 권리가 있던 시대

영화 <접속>에 접속하다



‘삶은 때론 먼 길을 원합니다… 비 오는 밤의 음악입니다.’

밤의 도로, 라디오 DJ의 촉촉한 멘트, 이어지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지금 보면 꽤나 힘이 들어갔지만, 근사한 분위기의 여전히 인상적인 영화의 도입부, <접속>의 한 장면입니다.

라디오 PD 동현(한석규)은 옛사랑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는 군 입대한 선배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아마도) 그 때문에 선배가 죽음에 이르자 그들의 사랑은 돌이키기 어려운 죄책감에 얼룩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던 동현은 마치 둘만의 시그널을 보내듯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들의 주제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를 선곡합니다. 어떤 주위의 눈총에도 고집스럽게 말이죠. 그런 동현에게 어느 날 익숙한 LP판이 한 장 전달됩니다. 역시 <Pale Blue Eyes>가 수속된 앨범 <더 벨벳 언더그라운드>입니다. 세상엔 같은 앨범이 무수히 존재하겠지만 동현은 곧바로 알아봅니다. 그건 동현과 여자의 추억이 스민 옛사랑이 보낸 바로 그 앨범이란 것을 말이죠. 이제 그만 잊으라는 그녀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동현은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한편, 통신 판매원 수현(전도연)은 친구의 연인을 짝사랑합니다, 사실 그를 먼저 좋아한 건 수현이었지만, 큐피드의 화살은 엉뚱하게 꽂혀 그녀의 친구에게로 향했습니다. 제길… 묘하게 꼬였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지만 그러므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랑. 둘도 없는 친구의 연인을 뺐을 수 없고, 타인의 눈물을 흘리게 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겠죠.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길은 홀로 단념하고 아파하는 것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사랑의 미련은 수현을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 밤, 수현은 답답한 마음에 드라이브를 나서고, 우연찮게 동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던 중 중앙선을 넘어 다가오던 차량에 큰 사고가 날 뻔합니다. 겨우 사고를 모면한 수현은 그 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Pale Blue Eyes>를 잊을 수 없었고, 동현의 프로그램에 그 곡을 신청곡으로 올리게 되죠. 절묘한 타이밍에 음악으로 이어진 인연이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한 동현은 그런 수현과 연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동현과 수현은 ‘접속’하고 서로를 연결하게 됩니다. PC 통신으로 소통하기 시작한 그들은 각자의 아이디로 만납니다. 해피엔드 그리고 여인 2.



현실은 해피엔드가 될 수 없는 옛사랑과 첫 번째 여인이 될 수 없는 짝사랑의 만남입니다. 하지만 각자 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채 익명의 공간에서 마주친 둘은 솔직한 심정을 터놓게 되고, 서로를 위무하며 점차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들의 만남이야말로 운명이란 건 둘만 빼고 관객 모두가 다 알게 되죠. 그리고 익명의 공간에선 인간의 인연이 완성될 수 없듯 서로를 통해 상처가 극복해가던 둘은 드디어 현실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둘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하죠. 결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느껴야 할 것이기에… 아직 익명의 공간이 두려워지기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이란 언제나 얄궂기 마련입니다. 둘에게 다시금 시련과 좌절이 되풀이됩니다. 옛사랑의 죽음을 알게 된 동현은 수현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방황하며 모든 걸 버리고 떠나려 합니다. 수현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애초 손바닥이 마주치지 못한 외사랑의 냉혹한 결말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녀는 사랑도 우정도 잃습니다.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과연 애라고 봐주지 말고 이놈의 심술궂은 큐피드를 조져야 합니다. 한 번 엎질러진 사랑은 어긋나도 되돌리기 어렵고, 가파른 파국의 절벽을 향해 치닫고 맙니다. 옛사랑이니, 짝 사랑이니… 아마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유일하게 의심해봐야 할 건 정작 자기 자신일 겁니다. 용의자는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집착하며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니. 그 또한 인간적입니다. 또한 그 집착은 누군가에겐 구원의 손길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수렁에 빠진 동현에게 손을 내민 건 수현입니다. 소극적인 태도로 사랑을 놓쳤던 수현은 이제 동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기다리겠다며, 꼭 만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약속 장소는 지금은 추억이 된 종로의 영화관입니다. 사실 둘은 그 영화관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죠(레코드점도 그렇고 그밖에도 영화에는 그런 장면으로 빼곡한데 지금 보면 좀 지나친 감도 있습니다). 동현도 약속 장소로 향합니다. 하지만, 동현은 수현을 보고도 주저하며 그대로 지나칩니다. 옛사랑의 트라우마와 새로운 만남의 두려움입니다. 그는 멀찍이 영화관 이층 카페에 앉아 수현을 바라봅니다. 그는 마음을 정할 수 없고 수현은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채 동현을 기다립니다.

영화는 아마도 해피엔딩입니다. 동현은 마침내 수현에게 다가서며 영화는 끝을 맺죠. 여기서 아마도라고 한 건 지극히 개인적인 악담일 뿐입니다. 분명 해피엔딩이지만 자꾸 보다 보니 가끔은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원치 않게도 그 이야기의 후일담을 상상해 버린다고 할까요? 영화는 희망적으로 끝나지만 실제 동현과 수현의 사랑은 이제야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요. 심술궂게 욕봐란 말도 해봅니다. 마침 <타이타닉>이 떠오릅니다. 불멸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렸지만, 그 후일담 같던 <레볼루션너리 로드>는 무척 질퍽하고 적나라해집니다. 같은 배우들이 호흡을 맞춘 두 영화는 마치 커플의 비포 앤 애프터 같은 것이죠. 아무튼 멜랑콜리 한 <접속>의 결말은 괜히 설레고 그래서 심술도 좀 납니다. 다소 식상한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은 <접속>처럼 희망적일 수만은 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좀 더 현실적인 영화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니까요.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이란 결국 각자의 취향에 달린 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 조금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부끄러운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매도 하지 않고 종로의 그 영화관을 찾았다가 혹독한 도보 훈련을 시키고, 약속 시간이나 장소가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큰 실수를 범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현처럼 절 기다려주신 분이 말씀하시길, 하도 안 오길래 그냥 가려다가 대체 어떤 놈이길래 하는 심정으로 이곳에서 기다려 봤다고 하시더군요. ‘기다림의 추억’도 아니고… 그런데 전 또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서 절 기다려준 그분은 두 배로 실망이 크고 화도 많이 나셨을 텐데, 참으로 대인배셨습니다. 한편 다르게 보면, 그래도 그땐 아직 우리에겐 엇갈릴 수 있는, ‘못 만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접속’ 상태인 지금은 편리하지만 분명 좀 지긋지긋해지는 면도 있으니까요. 때론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칼처럼 정확할 필요 없으며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할 여지가 있는 게 좋습니다. 지금은 쉬 건너뛰지만, 이미 만나고 난 다음의 이야기뿐 아니라, 아직 만나기 전, 만남을 기대하는 시간도 못지않게 근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지금은 비록 그 순기능보다 폐해를 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발전하는 도구를 탓할 순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그 도구를 이용하는 방식이고, 넘칠수록 절제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접속>도 이제 나이가 꽤 많이 들었습니다. 97년 작인 이 영화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 등장한 영화였고, 그땐 새롭고 신선하며 세련되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처럼 걸핏하면 말끝마다 ‘난 눈물이 나오지 않아’라며 스스로 안구 건조증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통하는 영화이고, 이젠 누구에게나 다소 익숙해져 버린 패턴의 감성 멜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영생을 얻는) 영화란 또 어디 있을까 반문해봅니다. 잊기 어려울 몇몇 주옥같은 장면들을 남기고,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할 만합니다(까마득히 잊고 지낸 옛 밴드의 쓸쓸한 음악까지 부활했죠). 참 적당한 영화라는 느낌도 듭니다. 적당한 소재, 적당한 음악, 적당한 이야기, 적당한 연기, 시의 적절한 영화였습니다. 마치 맛 좋게 버무린 듯한 웰 메이드 한국 영화라 여전히 볼만합니다. 풋풋했던 배우들의 모습은 매번 반갑습니다.

전 꽤나 자주 꺼내보는 편입니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방영하면 반드시 멈추고, 때때로 생각나면 스트리밍 서비스나 소장한 VCD로 봅니다. DVD가 아닌 무려 VCD. 그럴 기분이 드는 날이면, 러닝타임이 무리 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채 그냥 틀어놓고 다른 일을 보기도 하죠. 제겐 귀에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장면이 그려지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은 이미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를 모뎀 삼아 ‘접속’해 저와 제 지나온 시간을 연결합니다. ‘찡이이이잉‘ 하는 전화 모뎀 연결음과 함께… 어쩌면 그저 귀에 이명 소리가 들릴 뿐인지 모르지만.



덕분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느리고 답답한 PC 통신 시절에 대한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제 경우엔 여인 2가 없고, 대신 친하게 지내는 형이 있어 가끔 전화 모뎀을 연결해 밤새 게임을 즐기곤 했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몰래 거실의 전화선을 끌어와 연결했던 것이죠. "마지막으로 한 판만 더?" 하는 사이 날이 새는 줄도 몰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지서가 날아오고, 갑자기 오른 요금에 어머니는 의아해하시지만, 그다지 게임광은 못 되고 상습범은 아닌 까닭에 그 정도는 모른 척 애교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접속>으로 이런저런 추억에 잠기니 문득 라디오가 듣고 싶습니다. <접속>을 보면 라디오를 듣고 싶고, 라디오를 듣다 보면 <접속>도 생각납니다. 이른 아침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모처럼 카세트 플레이어의 라디오를 켜봅니다. 펜싱을 하듯 안테나를 길게 뽑아 지지직거리는 주파수를 맞춰봅니다. 자동 검색 기능이 없는, 다이얼로 주파수를 맞추는 구식 카세트 플레이어입니다. 언젠가 종이 박스 속에서 먼지 쌓인 추억의 카세트들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마련해둔 것입니다. 최신 기기를 쓰고, 딱히 아날로그 타입은 아니지만, 그냥 다시 틀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생애, 물건의 수명이란 참으로 짧구나 생각하며… 모든 건 낡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낡았다고 버릴 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도 인터넷으로 듣는 요즘 다이얼로 ‘접속’하는 건 실로 오래간만입니다.

무리긴 했습니다. 처음엔 음악은 이 맛이라며 듣다가 점차 손이 가질 않더군요. 아무래도 음질이 깨끗하고 조작이 편리한 것들에 이미 익숙해진 듯합니다. 차라리 LP라면 나을까요? 아무쪼록 오래된 테이프들 중엔 늘어난 것도 많았습니다. 그 한장 한장의 ‘추억‘들은 다시 박스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만의 맛이 있지만, 지금은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언제든 쉽게 스트리밍 서비스로 찾아들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전 그 이후로도 그 추억의 음악들을 찾아듣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취향이라고 할 만 한 건 없는 잡식성이지만, 저 역시 음악을 좋아합니다. 예전엔 음반이 나오길 기다리던 아티스트도 있었고 음악을 들으며 가사를 찾아서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차분한 마음으로 온전히 음악을 듣는 일은 드물어졌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간단히 검색해 버튼 한두 번 누르면 원하는 모든 곡을 곧바로 찾을 수 있고, 예전에는 구하기 어렵던 음반들도 대부분 가질 수 있는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공교롭게도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하면서부터 그렇게 되어버린 듯합니다. 많고 풍부한 것, 모두가 즐기도록 편리해진 건 분명 좋은 일인데,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제 취향이 잡식인 까닭입니다.

라디오도 그렇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건 참 오랜만입니다. 어릴 땐 라디오를 즐겨 들었습니다. 심야 라디오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워크맨을 머리맡에 두고 라디오를 들으며 잠에 들었고, 끝까지 듣기 위해 밤을 새운 날도 많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랬습니다. 조금은 심란해진 마음에 건성으로 듣긴 해도 초조하게 막히는 출근길의 벗으로 삼았습니다. 퇴근길엔 제 자신을 향한 자체 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찌나 똥폼이던지… 하지만 그런 라디오와 어느새 멀어진 기분입니다. 가끔 자동차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라디오를 듣는 일은 드뭅니다. LP나 CD, 카세트테이프와 달리 그래도 라디오는 여전히 라디오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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