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센티멘털 인디아 ①] 첸나이 그리고 600 루피

2019년 11월 26일 업데이트됨


삶의 필터가 가리지 않은 기억

아스라한 기억 속 잔영

어둠을 더듬으며 써내리던 소소한 필적

스스로 쓴 글에 진지했던 나날

젊은 날의 꿈, 그 꿈의 복원, 감성의 귀환

일곱 시 반, 알람을 건너뛰고, 삼십 분 뒤 알람 소리에 일어난다. 늦었다.

하지만 아침 샤워는 거를 수 없다. 오늘 하루 지필만큼의 장작이다. 샤워는 정확히 십오 분 만에 끝낸다. 그런 뒤 자주색 플라스틱 커버가 달린 손톱깎이로 새끼손가락만 남긴 채 나머지는 끄트머리 없이 단정히 자른다. 무료해서 생긴 징크스. '무료해서... 무엇이?' 로션을 바르고 손에 덜어낸 젤로 머리 모양새를 다듬고, 회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검정 양말과 흰색 도트가 가득한 청색 넥타이를 맨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며 문지방에 놓인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 '뻔하다. 너무...' 하지만 한 달 전에 난,

#사진. 마리나 비치 / 정인채

그곳에 서 있었다.

옅은 파도를 따라 밀려 들어온 바닷바람은 해변의 작은 깃발을 나부끼고, 또다시 휘몰아쳐 내 머리칼을 휘저어 놓았다. 일정을 마치고 잠시 해변에 닿은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벵갈만의 흐린 오후를, 구름 가득 낀 수평선을 마주했다. 출장으로 다시 찾은 첸나이. 다시 오기까지 얼마가 걸렸던가? 외면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요동치는 바람의 철없음을 온몸 가득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변덕을 부려 금방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그곳에 불어닥칠 성난 해일은 그때만 해도 아직 내 마음속 소소한 변덕이었던 것이다.

퇴근길에 뉴스를 본다. 해안선이 영구적으로 변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첸나이 해안이다. 나는 TV 화면을 사이에 두고 망연자실 얼마 전 서 있던 그곳의 극심한 변덕과 재회한다. 마리나 비치는 폐허로 변해 있다. 아나운서가 전한다. '인간의 죄악이고, 인류의 슬픔이다.' 난 안도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비겁하게 홀로 달아난 기분이다. 상상 속의 난 매정한 해일이 되어 그곳을 복기한다. 만약 지금 내가 그곳에 있다면 변덕을 부린 파도 앞에 무어라 했을까? 아마 한 마디 푸념조차 내뱉기 전에 삼켜졌겠지만.

그때, 출장 일정을 마친 난 남은 오후 시간 동안 첸나이를 새겨두려 밖으로 나섰다. 이곳저곳 들렸다. 시내 백화점에서 마음에 없는 선물까지 챙기고 나왔지만 아직 시간이 일렀다. 문득 옛 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마리나 비치의 모래사장에서 뜨뜻미지근한 맥주를 한 잔 한 기억이다. 즉시 릭샤를 불러 세웠다. 설레는 기분에 운전석에 두 명이나 올라탔지만 모른 척했다.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 있지만, 여행도 아닌 출장이니 귀찮아졌다. 여행보다 출장은 유독 지친다. '마리나 비치!' 릭샤왈라에게 해변 주위의 아무 레스토랑이나 가자고 했다.

정확한 목적지를 대지 않은 건 실수였다. 결국 레스토랑은 찾지 못해 해변에 멈추게 했다. 릭샤왈라에게 기다리게 한 뒤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해변 야시장 쪽으로 향했다. 야시장이라고 해봐야 귀여운 구석이 있는 곳이다. 곧장 바다로 다가가 더위로 달은 몸을 바람에 식혔다. 도심처럼 바닷가도 햇살을 피할 수 없지만, 바람은 한줄기 생명수 같았다. 첫 인도 여행에서 델리를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인도를 돌아 닿은 곳이 바로 이 곳 첸나이였다. '그땐 여기서 더 갈 수 있을지 포기할지를 두고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옛 추억의 향수가 살아났다. '릭샤왈라를 보내고 이곳에 잠시 머물러 볼까?' 하지만 그때 무게감 있는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놓았다. 가는 곱슬머리인 나는 바람에 민감했다. 그것이 변덕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파도를 등지고, 바람을 등지고, 또 바다를 등졌다. 기다리고 있던 릭샤왈라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인조 릭샤왈라는 대어를 낚은 낚시꾼과 같았다. 그들은 최초의 언약을 번복하기 시작했다. 기다린 비용을 추가해야 한다고 하다가 기어이 왕복이 아닌 편도였으며, 약속했던 100루피가 왕복 700루피가 되었다. '휴우 우우 이번만큼은 기분 좋게 여정을 마치려 했는데...' 인도 여행에선 흔한 일이다. 빠져나갈 방법도 알았다. 내 목소리는 커졌다. 단호한 명령조 말투에 그들은 움찔했다. 나는 인심을 쓰는 척 왕복 200루피 정도까지만 인정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때 내 주머니에 남은 돈은 600루피에 불과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700 루피에서 모자랐던 것인데, 환전을 많이 해봤자 어중간하게 남기면 아까우니 되도록 환전해두기 싫었던 탓이다. 이런저런 비용을 쓰다 보니 남은 돈이 그것뿐인데, 절박한 마음에 나는 결국 우격다짐으로 위기를 모면한 셈이다. 물론 레스토랑 생각 따위는 버리고 곧장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사나웠다. 도착하기까지 윽박을 지르고, 경멸적인 어투로 일관했다. 나 스스로도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당황할 정도로... 왜일까? 주체할 수 없을 울분이 하필 피골이 상접한 릭샤왈라에게 쏟아졌다. 나도 결국 약자에게 강한 척하는 그런 인간일지 몰랐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을 보내고, 호텔의 바에 들어가 킹피셔를 시켰지만 한 병 채 다 마시기도 전에 방으로 돌아갔다. 피곤하고 비위가 상했다. 술을 안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맥주 한 잔에 그런 건 처음이었다. 출장도 여행 같은 여전한 인도가 피곤하게 느껴졌고, 자신에 대한 분노 일지 슬픔 일지 모를 마음속 응어리가 첸나이의 마지막 밤을 의기소침케 했다. 다음 날 시간이 넉넉하지만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여유 있게 식사도 하고 가는 길에 주변을 간단히 돌아봐도 될 시간인데, 차라리 공항에서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내가 인도를 그렇게 대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데다가 그럴수록 또 묘하게 비행기는 연착되어 거의 반나절을 탑승 수속도 못한 채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야 인도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그런 뒤 지진 해일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마리나 비치의 어시장도, 사람들도 모두 휩쓸려 갔을 것이다. 문득 내가 윽박을 질렀던 릭샤왈라들이 생각났다. 그러니 죄책감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까짓 차라리 600루피라도 쥐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된다. 그들은 괜찮을까?

그래서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감성의 인도에 대해...

#감성 #여행

조회 9회

​대한민국

  • Twitter Basic Black
  • 블랙 인스 타 그램 아이콘
  • 블랙 대표자 아이콘

Copyright © emoTur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