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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도돌이표

이터널 선샤인, 순수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





벡(Beck)의 노래가 흐르던 어느 겨울밤, 당신과 난 텅 빈 도로를 달립니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던 우린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감정이 격해집니다. 화가 나고, 또 화가 난 상대에게 화를 내며… 모든 건 급변합니다. 모든 게 단 하루 만에 무너지진 않지만 무너지는 순간은 한순간입니다. 참다 못 한 당신은 당장 차를 세우라며 소리칩니다. 세우면 끝이란 걸 직감하지만 몸은 운명에 순응합니다. 차는 멈추고, 주저 없이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대로 한밤의 도로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마음은 다릅니다. 비록 세상에 영원한 건 없을지라도 가능하다면 단 한 번 더, 지금의 장면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달려가 어둠 속의 잔영처럼 남은 손을 붙잡고 싶습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끝 모를 무력감 속에 밸런타인데이를 맞은 조엘(짐 캐리). 그는 출근을 포기한 채 홀로 몬토크 해변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만납니다. 밸런타인데이, 춥디 추운 2월의 바다, 빨간 후드 티에 파란 머리를 한 묘령의 여인 클레멘타인. 관심이 가지만 자신감 없이 소심하기만 한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이 다가옵니다. 둘의 사랑이 시작된 첫 추억입니다.

둘은 연인이 됩니다. 하지만 사소한 다툼이 거듭되며 갈등이 쌓이고,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긴 채 둘은 이별합니다. 이별의 아픔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클레멘타인은 조엘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 삭제소(라쿠나)’를 찾고, 그곳에서 실험적인 치료를 받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엘 또한 모든 걸 잊기 위해 같은 치료를 받게 되죠.


조엘의 치료가 시작되자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삭제됩니다. 싸우고 다퉜던 안 좋은 기억들입니다. 하지만 치료가 거듭될수록 시간을 거슬러 행복했던 사랑의 시작, 그 뿌리 점에 근접하고, 조엘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그 추억을 사수하려 듭니다. 마치 주위의 반대를 피해 야반도주하듯 다른 기억 속으로 기억 속 클레멘타인을 데려가며 도피 행각을 벌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치료는 성공(?)하고 모든 기억이 지워집니다. 기억 속 클레멘타인이 지워지려는 찰나 조엘은 그녀에게 처음 둘이 만난 몬타크 해변에서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현실 속에서 지워진 둘, 잊힌 기억 속의 약속, 둘은 다시 만나게 될까…



영화 한 편이 저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한 적 있습니다. 저의 첫사랑이 <시네마 천국>이었다면, 사랑의 미련은 <이터널 선샤인>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과 같은 인생을 산다고 말하듯, 어쩌면 관객 또한 자신이 사랑한 영화처럼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레멘타인이 커피에 담아 마신 봄베이 사파이어도 이 영화를 본 뒤 알게 되었죠. 그러고 보니 진 토닉을 마시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고통스러운 영화입니다. 누군가 그래도 끝은 희망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희망에 이르기까지 마디마디 아린 상처를 예리하게 도려내는 듯합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선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지만, 정작 영화는 좀처럼 지울 수 없을 강렬한 인상을 남기니까요. 어지러울 만큼 암울하고 시종일관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또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건 관객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보는 내내 깊게 몰입하며 공감하므로 사랑에 관한 영화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꼽을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다시 말해 ‘슬프도록 아름다운’ 지웠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꼭 그럴 필요 없는 지금까지도 제 책꽂이 앞 열에 꼽아두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좀처럼 볼 엄두도 못 내면서.


어쩐 일인지 그 엄두를 낼 때가 있는데, 감당하기 어렵지만 음악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면과 더불어 배우의 연기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특히 웃기지 않는 배우 짐 캐리를 만나는 시간이 되어줍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마치 아무리 익살스러운 배우도 우울한 날이 있는 법이라고 털어놓는 듯합니다. 자타공인 그의 희극 연기는 일품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저는 웃기지 않는 그의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죠. 어쩌면 그 시작은 <트루먼 쇼> 일 것입니다. 거기서 일종의 예방 교육 같은 걸 받았고, 이미 <이터널 선샤인>의 첫 장면이 시작될 때는 기꺼이 진지한 짐 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녹색의 광기 어린 얼굴은 우수에 가득 찬 얼굴로 변합니다. 어쩌면 깨지기 어려울 편견을 남겼음에도 그것을 능가하는 배우에게서 희열을 느낍니다.

영화를 다시 보니 오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세월이 가르쳐 주었지만, 기억만은 미련하게도 자꾸만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가려 듭니다. 아직도 모든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쩐지 기억이란 지울 수 없어 지우려 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는 듯합니다. 차라리 인생에 도돌이표가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보겠으나, 기억에만 도돌이표가 가득합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그 기억을 생의 일부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또 새로운 기억들과 더불어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혹, 어쩌면, 영화의 제목이자 알렉산더 포프의 시 구절처럼 그 기억이야말로 정말 제 삶의 ‘순진무구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일지도 모르죠.

돌이킬 순 없지만,

어느 해변에서 클레멘타인과 재회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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