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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랑한다고 말할까

두 주먹을 쥐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어바웃 타임>



지난 영화를 하나씩 다시 꺼내어 보니 마치 그렇습니다.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한 번 스쳐간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영화에 얽힌 공감각적인 기억이 오롯이 떠오릅니다. 좋든 싫든, 홀로든 함께든, 명작이든 망작이든, 아예 보지 못했으면 못했지 한 번이라도 본 이상, 육하원칙처럼 무엇에 이어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까지의 모든 기억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따라옵니다. 결국 ‘내가 본 영화’란 어떤 의미에선 그에 얽힌 주관적 기억이고, 그런 이상 어떤 영화든 한번 소비하고 잊을 영화란 없을 듯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지겨워하며 반복하길 싫증 내는 편인데, (새로운 영화가 설렌다면) 영화는 다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2013년 작 <어바웃 타임>을 다시 보며 느끼는 감정입니다.

팀(돔놀 글리슨)은 성인이 되자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가문의 비밀을 듣는데, 그건 집안의 남자들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태솔로인 주인공은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시간을 되돌립니다. 물론 시간을 돌려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지만, 팀은 이후 시간을 되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독립해 런던으로 간 그는 직장을 찾고 우정을 쌓으며 메리(레이철 맥아담스)와 만납니다.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 자체보다는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성장에 중점을 둔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특별한 능력이라면, <터미네이터>처럼 의미심장하고 스펙터클 한 이야기를 꾸려갈 수도 있고, <백 투 더 퓨처>나 <엑설런트 어드밴처>처럼 유쾌한 모험담 등 좀 더 판을 크게 키워 다양하게 풀어갈 수도 있지만, <어바웃 타임>은 마치 그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개인과 주변의 소소한 드라마에 그 능력을 곁들일 뿐입니다. 보기에 따라 너무 가볍고 신변잡기적이란 느낌도 들지만, 이야기에서 시간 여행은 무수히 써먹은 소재고, 그 대수롭지 않음이 되려 특별해 보입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거창해지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일생에 대한 화두에 집중시킨다고 할까요? 시간을 되돌리는 걸 활용하지만, 그건 흥미로운 영화의 양념이고, 자칫 심각하고 복잡다단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맛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처음부터 진지해질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미소 짓게 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생각해 봐’하며 넌지시 화두를 던집니다. 전 그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함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한편, 이를 통해 영화는 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합니다. 시간 여행의 유전자를 가진 주인공 또한 성장하며 인생의 기쁨은 물론, 슬픔도 겪기 마련입니다. 팀은 잘못된 일이 있으면 몇 번이나 거듭 시간을 되돌리고 다시 시도했지만, 덧칠할수록 그림이 엉망이 되듯 거기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어떤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아 갑니다. 가령, 주변을 챙기다가 첫눈에 반한 사람을 놓칠 수 있고, 동생을 구제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자 아기의 얼굴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을 되돌리면 아기의 모습도 달라지기에, 스스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아버지 또한 병이 들어도 시간이 되돌리길 포기하는 순간도 마주하게 됩니다. 때때로 “아니 그러면 안 돼?” 하며 의문을 품겠지만, 이 영화가 어떤 시간 여행의 이론을 논하는 자는 건 아닙니다. 왜 하필 집안 남자만이냐고 할 필요도 없죠.


다만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무한정 되풀이되는 시간을 통해 한정된 지금 이 시간,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시간 여행은 결국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 여행입니다. 좋고 행복했던 것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듯이… 이를 통해 팀은 요령껏 시간 여행하며 원하는 대로 성공하는 삶만 사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을 시간 여행하며 되풀이하듯 아끼며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웁니다. 되돌릴 생각보다 지금에 충실하나니 좀 교과서적이긴 하죠? 나라면 어떡할까… 상상을 부르기도 합니다. (존 코너를 한 번 만나야 할까…) 그러다가 문득 정곡을 찌르는 기분인데, 아무쪼록 따뜻한 인생의 조언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엔 마음에 드는 장면이 참 많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오빠와 동생이 손을 잡고 시간을 돌리는 장면도 멋지지만, 제겐 프러포즈 신이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첫사랑의 유혹을 뿌리치고 달려온 팀은 메리에게 프러포즈를 합니다. 잠들었다 깨어난 메리는 (시간 여행처럼) 당연하다는 듯 승낙을 하지만, 그보다는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음악을 틀어 놓았나며… 자긴 프러포즈한다고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요란 떨지 않아 고맙다고 합니다. 그러자 팀은 조용히 거실로 나가 모두에게 조용하라고 말하는데, 실은 친구와 악단을 불러놓았던 것이죠. 어쩐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듯도 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그밖에 <일 몬도(il mondo)>라는 곡을 배경으로 비바람 부는 결혼식 장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결혼에 관련된 로망이 없는 저에게도 ‘흠, 이런 결혼?’하며 한 번 상상해보게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에의 연결점이기도 한 ‘일 몬도’는 낱말 그대로 한없는 세계란 의미니 또 여러모로 재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또한 주인공 팀의 성장을 다룬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직접 영화의 마지막까지 보면 좋을 듯합니다. 감독이 작정을 하고 달려든 감동 포인트입니다.


감독 리처드 커티스의 영화를 보고 실패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일단 분위기가 좋습니다. 영화관 데이트든 가족과 함께든 무리 없고, 혼자서 울다 웃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연말에 푹신한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기에 딱인데, 백익 무해한 초이스라고 할까요? 무엇보다 영국 영화만의 감성이 마음에 듭니다. 냉소적인 듯 툭툭 내뱉지만 사랑스럽고 따뜻한 드라마가 어김없이 펼쳐지죠. <어바웃 타임> 역시 능숙한 손길을 보여줍니다. 좀처럼 싫어하기 어려운 빌 나이 아저씨, 냉소적인 듯 잔잔하고 섬세하며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위트와 유머… 그의 전작인 <노팅힐>과 <러브 액츄얼리> 답다고 하면 적절할 겁니다. 다만 그 싱거운 유머는 내로남불입니다. 전 이런 영화를 너무 즐겨 본 탓에 시종일관 싱겁지만, 알고 보면 리처드 커티스는 영국 감독이자 극작가지만 태어난 건 뉴질랜드입니다. 하긴 그 나물에 그 밥일까요? 저도 이 분 탓만 할 건 아닙니다. 제 경우 다른 영국 영화들도 그렇고 오아시스, 블러 등 브릿팝 특히 콜드 플레이의 청승에 이십 대의 많은 걸 바쳤으니, 태어난 건 한국이지만 그런 코드입니다.


<어바웃 타임>은 제게 시간여행을 그린 그 어떤 영화보다도 아름다운 시간여행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두가 그렇듯 저도 가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상상하는데, 그건 설제로 무언가를 되돌리고 바꾼다기보다는 그때의 아름다웠던 시간을 곱씹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 제가 지난 영화를 다시 꺼내 보며 하나씩 되새겨 보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 지금 이 순간 이미 시간여행 중인 셈입니다.

두 주먹을 쥐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어깨에 힘을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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