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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한 번쯤 영국인 환자가 된다

일생의 사랑에 관한 마지막 추억, <잉글리시 페이션트>



기억나지 않아. 아니, 기억하지 않을 게… 


2차 세계 대전 말미, 신원 미상의 환자가 영국군에 후송됩니다. 영국인 환자로 추정되는 그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기억 또한 외면합니다. 하지만 영국인인 이상 큰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다릴 뿐이죠.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운 그는 길가의 버려진 건물에 머무르기로 합니다. 전쟁 통에 환자 후송은 어렵고, 고된 길을 가봐야 어차피 희망이 없습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쉬)가 곁에 남습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건 영국인 환자만이 아닙니다. 한나 또한 상처가 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가슴 깊숙한 곳에 내상을 입은 여인이죠. 실의에 빠진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남아 환자를 돌보기로 합니다. 어쩌면 그녀는 눈앞에 사그라져 가는 생명의 빛을 지키며 이미 잃어버린 생명을 되새기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은 그렇듯 모두를 심각한 부상자로 만듭니다.  


영국인 환자와 한나는 고통의 안식처에 머무르며 안정(?)을 찾아갑니다. 한 사람은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것입니다. 한나는 폭발물 제거반의 칩과도 만나게 되죠. 그러던 중 카라바지오(윌리엄 데포)라는 이름의 남자가 그곳을 찾아옵니다. 영국의 정보원인 그는 영국인 환자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영국인 환자에게 원한을 품은 그는 복수를 벼르며 힘겹게 찾아왔지만 허무하게도 산송장과 만난 셈입니다. 카라바지오의 등장으로 스스로 외면한 영국인 환자의 기억도 하나씩 되살아납니다. 이제 그는 지난 일을 회상합니다. 그의 이름은 알마시(랄프 파인즈), 그는 타락한 변절자이자 한 여인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지리 학회의 일원인 알마시는 아프리카에서 지도 제작에 참여하던 중, 영국인 동료 제프리(콜린 퍼스)와 그의 아내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을 만납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욕망 속에 알마시와 캐서린은 사랑에 빠집니다. 격정적인 그 사랑은 찬란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맙니다. 곧 전쟁이 발발하고 지리 학회도 해체됩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랑 또한 제프리에게 발각됩니다. 그리고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영화의 주옥같은 명장면들로 하나씩 완성되어 갑니다. 알마시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사이 심각한 외상이 그가 느끼는 고통의 본질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을 겪은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듯 죽음을 앞둔 영국인 환자가 지난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이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줄거리입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가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일 듯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평생 단 한 번의 절절한 사랑에 관한 마지막 회상입니다. 물론 곁들여진 이야기들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현재의 알마시 곁에 머무르는 주변 인물들, 한나와 칩, 카라바지오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로, 저물어가는 사랑과 대칭해 새롭게 싹트는 사랑,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한나와 칩의 사랑은 알마시의 사랑과 어우러져 절묘한 균형을 맞추는데, 이 영화가 표현하는 사랑이 비단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질 수 있게 만듭니다. 다만 칩에게 정중하게 전합니다. 그런 이벤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알마시의 사랑은 끝나도 누군가는 계속 사랑할 것입니다. 물론 알마시의 고통이 끝나도 삶이 지속되는 한 그 같은 상처와 슬픔은 누군가에게 계속될 것이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런 삶의 연속성에 관한 의미를 품는 듯합니다. 볼수록 감독(앤서니 밍겔라)의 깊이와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압도적인 서사적 로맨스에 매료되고, 거듭 보는 사이 이러한 의미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던 기억입니다. 수없이 보았다는 분은 있어도 한 번 보았다는 분은 드문 영화… 여러 번 곰삭혀 볼 명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으로 두 군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명장면이 수없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 두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보았던 입장에서도 다시 꺼내어 보게 만들죠. 먼저 하나는 사막 속에 유유히 날아가는 비행 장면입니다. 포격을 받은 비행기는 서서히 잠들어가듯 미끄러지죠. 영화의 첫 장면인데, 첫 장면부터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공감하게 만든 장면입니다. 아마도 제 인생 최고의 영화 첫 장면이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칩의 성당 속 ‘작업 장면'입니다. 앞서 알마시와 캐서린의 동굴 장면과도 오버랩되죠. 다시 한번 칩에게 정중히 말합니다. 제발! 그러면 외딴섬에 갇힐 수도 있어요. 


한편 영화 음악 또한 빼어납니다. 마치 음악만 들어도 영화의 한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데, <베티 블루 37'2>로 알려진 가브리엘 야례가 맡았다고 합니다. 사실 영화를 처음 볼 땐 영상 속에 너무 완벽하게 스며들어 음악이 어땠는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에 집중한 눈과 귀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남겼다고 할까요? 혼연일체입니다. 역시 아련한 영화 속 장면을 배경으로 미끄러지듯 피아노 선율이 흐르면 결코 관객을 배신하지 않는 듯합니다.  


꼭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보지 않을 때도 가끔 알마시를 떠올립니다. 알마시의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아마도 스스로 조각할 수 없는 다양한 모양, 여러 색깔을 지니겠지만, 저의 경우 이젠 그와 같은 사랑을 원하진 않습니다. 너무 위험하고 치명적입니다. 음식은 맵고 짜게 사랑은 조금 슴슴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젠 음식도 슴슴하게…) 다만 그런 저도 사랑에 관해 추억하면 어느덧 알마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영국인 환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알마시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알마시처럼 오늘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사랑합니다. 코리안 페이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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