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
애정의 소리를 붙잡을 수 있을까?
사랑, 그대로 흘려보낼 줄 안다면... <봄날은 간다>

오랜만에 수색 역에 내립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옛 느낌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봤던 이 장소는 영화와 그에 얽힌 추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시 한번 그 영화를 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길었던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올 무렵이었습니다. 전 아직 학생이고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죠. 몇 차례 경유지를 거쳐 홍콩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숙소를 구할 여유 없어 밤새워 도심을 걸어 다니기로 합니다. 맞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를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이고, 그만큼 홍콩은 화려했으며 전 누아르였으니까요.
영화의 추억을 더듬어 걷다가 작은 음반점이 보여 들어가 봅니다. 늘 그러듯 소소한 전리품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뭐든 좋지만 대개 현지어 판의 도서나 음반 혹은 영화가 좀 더 끌리는 편입니다. 읽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됩니다. 일종의 토템일 뿐이니까요(그 토템들은 아직도 언젠가 이해받길 바라며 제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아무튼 메가 세일 기간의 홍콩인데, 제 쇼핑은 그렇듯 동 떨어졌습니다. 그날 얻은 토템도 좀 엉뚱합니다. (당시엔) 얼마 전 개봉했던 최신 한국 영화인데 홍콩에서 한국 영화의 VCD를 만지작거립니다. 좀 망설여집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건데… 하지만 <춘서(春逝) : 애정의 소리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고 쓴 중문 재킷은 마치 희귀본 같습니다. 만약 상우와 은수가 껴안은 사진이 없다면 이게 뭘까 싶겠죠. 결국 지금 아니면 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함께 데려가기로 합니다. 이미 다른 토템을 몇 개 골라두었지만, 홍콩의 비닐봉지는 유독 연약해 가득 채워야(?) 하는 법이라며… 이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중경삼림> 속 633(양조위)의 집을 답사한 터라 자꾸 물건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됩니다.

토템의 한국 이름은 <봄날은 간다(2001년)>입니다. 춘서가 곧 봄날이 지나간단 의미죠. 영화 속 주인공 상우(유지태)는 애정 아니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음향기사입니다. 그는 아버지, 고모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며 살아갑니다. 가족의 온기를 품고 살아온 듯하지만, 그에겐 오랜 상처가 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채울 수 없을 모정의 부재 속에 외롭게 자란 것이죠. 긴 시간 눈에 보이는 상처는 아문 듯하지만, 그 아픔의 기억까지 깨끗이 지울 순 없습니다. 상우와 그 가족은 마치 좋았던 봄날을 보내고 남겨진 사람들, 그 후일담처럼 느껴집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수시로 집을 나서고, 상우와 아버지는 늘 서먹서먹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런 상우에게 어느 겨울 은수(이영애)가 나타납니다.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 겸 프로듀서로 일하는 은수가 ‘자연과 사람’이라는 코너를 위해 직접 소리 채집 작업에 나선 것이죠. 프로듀서와 음향기사로 만난 둘은 함께 여행하고, (일 하라고 했더니) 서서히 호감을 느끼며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마치 영화 속 자연의 소리처럼 어떤 극적인 계기보다 은근슬쩍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오죽하면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그다지도 두드러져 보일 수 있을까요? 아무튼 사- 서- 바람 불고 눈보라 칠 때 들리는 대밭 소리 같은 둘의 사랑과 함께 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만남이 자연의 소리와 같았다면 이별 또한 그럴 수 있을 듯합니다. 자연스레 불어온 상우와 은수의 사랑은 또 자연스레 식어갑니다.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은수는 사장의 순간을 즐길 뿐 그 또한 변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결국 현실의 문제들은 수면 위로 드러날 테니까요. 그녀는 직장 동료들에게 상우를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둘의 관계를 밝히길 꺼려하는 것이죠. 반면, 상우는 서두르며 조급해합니다. 순수하고도 여린 그는 사랑에 대해선 밟지 않은 눈과 같습니다. 어쩌면 모성에 대한 아쉬움이 은수에 대한 사랑에 더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혼을 생각하고 가족에게 은수를 소개하려 하지만, 은수는 부담스러워하고, 그렇게 둘은 서서히 이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그렇게 봄날은 지나갑니다.
밟지 않은 눈처럼 순수하고 여린 시절 제 심금을 울렸던 영화 <봄날은 간다>. 계절과 상관없이 특히 겨울에 봄날이 가는 이 이야기를 자주 꺼내어 봅니다. 자연과 더불어 젊은 배우들의 모습 덕분인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멜로 영화입니다. 어떤 사랑의 흐름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하지만 언제나 아름답게만 느껴지진 않아 보면서 짙은 한숨을 많이 내뱉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결국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니까요. 서글픈 이야기에 감정 이입을 하다 보니, 둔한 상우에게 화가 나고 은수에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론 라면마저 증오하며 둘의 미래를 제멋대로 예언해보기도 합니다. 저러다가 쟤네 또다시 만난다며…
돌이켜 보면 원래 사랑은 좋고 또 화나는 것인데, 모른 채 두 손 꼭 잡고 다가오는 현실을 하나씩 직면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생각이 많아도 썩 바람직하지 못하니까요. 지구가 행성과 충돌한다는 걸 미리 알게 된다고 더 좋을 리 없습니다. 제가 밟지 않은 눈처럼 순수하고 여린 사람이라서 하는 얘긴 결코 아닙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뭐 그럴 수 있겠다고 하죠(물론 훈수만 두고 정작 자기 얘긴 다르지만). 슬픈 얘기지만 사실 ‘세상에서 변하는 것들’의 목록이 있다면, 거기엔 필시 사랑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정점에 오르면 다시 내려가니까요. 만약 변치 않길 원한다면, 이 세상의 상우와 은수들은 상대에 맞춰 끊임없이 변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변치 않을 순 없으므로, 변하는 사랑에 맞춰 서로 계속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것이죠. 2인조의 즉흥극이 떠오릅니다. 전 즉흥극에 약했으니 부끄러운 지난 일들도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때 흐르는 대로 그대로 흘려보낼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토템이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섭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낮과 달리 바닷바람에 실려 온 밤은 무겁고 쌀쌀맞게 느껴집니다. 무작정 밤길을 걷다 보니 삼합회도 만날 것 같고 점차 다리가 무뎌집니다. 일일 일식으로 먹은 햄버거 세트만큼의 에너지도 이미 다 소진한 듯합니다. 화려한 불빛에 물든 도시도 밤이 깊어지자 눈을 뜬 채 잠이 들려합니다. 그 많던 거리의 사람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가 어디일까,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자꾸 움츠러드는 몸을 기댈 겸 길거리의 벤치에 앉습니다. 이대로 날이 새기까지 견뎌야 합니다. 잠들면 안 됩니다. 이른 아침에 떠나는 비행기 편이고, 그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려면 제때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 잠이 쏟아집니다. 잠들면 안 되는데… 하지만 눈꺼풀은 하염없이 내려오고 전 그 자리에서 잠시 잠들고 말죠.
이별한 상우는 펑펑 눈물을 흘립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그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상우를 위로합니다. 이미 버스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번엔 은수가 상우를 찾아오죠. 은수는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상우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하지만 수색 역에서 돌아오지 않을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상우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죠. 상우의 사랑도 변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 꿈속에서 은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은수가 무언가 답하려는 순간, 철렁하며 눈을 뜨고 떨어진 고개를 듭니다. 시간부터 확인합니다. 아직 괜찮습니다. 곁에 두었던 토템 비닐봉지도 그대로입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떴고 출근하는 인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홍콩의 빌딩 삼림 속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밤이면 모두들 다 어디든 수렴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집니다. 저도 수렴되기 전에 그만 갈 길로 향하기로 합니다. 공항으로 가는 전철에 오르자 비로소 안도감이 듭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질문에 은수는 어떻게 답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색 역에서 떠올린 영화와 그에 얽힌 추억에 관한 제 이야기입니다. 요약하자면 홍콩의 봄날은 간다라고 할까요?
수색 역에서 집으로 돌아가 블루레이 플레이어에 홍콩에서 온 <춘서(春逝)>를 넣어봅니다. 하지만 몇몇 징징거리더니 재생될 수 없는 매체를 넣었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화면에 뜹니다. 이젠 더 이상 <춘서(春逝)>를 볼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오래된 플레이어들은 모두 고장 났는데… 하- 허- 답답한 마음에 창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겨우내 들어찬 무거운 공기를 내보내듯, 누군가를 손꼽아 기다리듯. 창밖으론 어느덧 봄이 다가왔지만, 날씨가 심상찮습니다. 밤은 아직도 쌀쌀한데 낮은 여름만큼 후덥지근합니다. 창가에 잠복한 채 빈틈을 노리던 모기가 이때 다 하며 성가시게 달려듭니다. 전 녀석에게 화형 선고를 내립니다. 진짜 더운 곳에선 휴가나 떠나는 녀석들이… 따닥따닥! 하지만 이러는 사이 계절은 아마도 어영부영 봄을 건너뛰어 곧바로 뜨거운 여름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봄날은 이제 막 왔는데…
문득 ‘봄날은 간다’고 중얼거려 봅니다. 그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 다시 오는 봄날인지 또 다른 봄날인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봄날은 좀 더 소중히 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국 #영화 #리뷰 #봄날은 #간다 #유지태 #이영애 #걸작 #봄날은간다 #사랑 #그대로 #흘려보낼줄 #안다면 #애정의 #소리를 #붙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