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

한때, 같은 영화를 보았던 이제 다른 우리

인디의 행복한 반란, <원스>




“이 영화 어떨까?”

“글쎄…”

여느 때처럼 약속 장소는 영화관. 딱히 영화를 보고 싶진 않은 눈치지만, 억지로 손을 이끌었습니다. “난 날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좋아.” 언젠가 대수롭지 않게 흘린 말이지만,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물론 이끌어 달란 건 좀 다른 의미란 걸 알지만, 그때 제가 이끌 수 있는 건 고작 영화 한 편 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이 좋습니다. 저예산의 독립 영화, 이제 막 포스터만 본 영화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 영화…




영화는 통기타 반주와 함께 시작합니다. 더블린의 어느 골목, 홀로 버스킹에 나선 남자(글렌 핸사드)는 50% 세일 표지판이 세워진 쇼 윈도 앞에서 낡은 기타를 튕기며 노래 부르죠. 이어 약간은 난데없고 우스꽝스러운 추격신이 펼쳐집니다. 그런 뒤 어둑해진 골목에서 남자는 또 한 곡을 부릅니다. <Say it to me now>입니다. “Scratching at the surface now(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청승맞은 운율과 노랫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는 절규합니다. “…Say it to me now(지금 내게 말해줘).” 걱정된다는 주위 걱정에 그냥 노래 불렀단 핑곌 댈 수 있을 멋진 곡입니다. 누군가 이런 곡을 만들 영감을 받았다면 또 얼마나 서러운 일을 겪어야 했을까요? 청승 브라더즈라면 빠질 수 없을 제겐 그리 어려운 의문은 아닙니다. 헤어졌구나…

그렇습니다. 마음껏 청승 부릴 특권은 주로 실연한 이에게 주어집니다. 글렌의 오랜 연인도 싱어 송 라이터를 꿈꾸며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던 그를 버려둔 채 도시로 떠났죠. 이제 글렌은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며 실연의 상처를 벗 삼아 곡을 쓰고 노래 부릅니다. 좌절과 아픔을 창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데 공감합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골목, 음울한 분위기가 글렌의 상처 입은 그림자와 어울립니다. 모 가수는 우스개 소리로 결혼해 아이가 태어난 이후 행복한 나머지 더 이상 슬픈 악상이 떠오르지 않자 원룸을 구했다고도 하더군요. 음악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아프지 않아도 아파지려는 그런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굳이 헤어진 연인의 옛 동영상을 찾아 훌쩍이며 작사하는 글렌의 모습은 창작의 웃픈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글렌 앞에 한 여인(마르케타 이글로바)이 등장합니다. 절절한 노래에 이끌린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이지만, 고향에선 음악을 했습니다. 그녀는 글렌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죠. 둘은 음악을 매개로 금방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마음이 통한 그들은 악기 가게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합주하며 듀엣으로 즉흥곡을 만듭니다.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난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원해요)…”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시작된 연주는 이내 훌륭한 화음으로 어우러집니다. <Falling slowly>입니다. 마르케타는 글렌의 다른 곡에도 관심을 보입니다.




마르케타는 함께 글렌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글렌은 마르케타에게 이성적으로 다가가려 합니다. ‘라면 먹고 갈래’도 아니고 ‘자고 가겠냐’는 글렌의 말에 여기 아일랜드에도 또 한 명 참 어설픈 사람이 있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게 됩니다. ‘바보야…’ 역시 그건 남자만의 성급한 착각일 뿐이죠. 남자니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만, 바보니까 그런 곡도 씁니다. 놀란 마르케타는 거부한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납니다. 그녀는 음악을 통한 순수한 관심과 우정일뿐 다른 감정을 가진 건 아닙니다. 그렇게 둘은 엇갈리는 듯하죠.  


하지만 글렌은 곧 마르케타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을 사과하죠. 그들에겐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엔 글렌이 마르케타의 집까지 함께 걷게 됩니다. 그렇게 알고 보니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 딸아이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아직 고향에 머무는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그럼에도 그 감정이 무엇이든 글렌은 여전히 마르케타에게 교감합니다. 영화는 내내 두 사람 간엔 사랑인 듯 아닌 듯 한 촉촉한 분위기가 내내 이어지죠. 그런 불안한 멜로를 지탱해주는 건 바로 음악입니다. 애매한 감정이 지속되는 둘은 일단 복잡한 감정의 선을 긋고, 다시금 음악으로 소통합니다. 글렌은 마르케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줍니다. 계단참에 나란히 앉아 함께 CD플레이어를 듣던 그녀는 그중 한 곡에 관심을 가집니다. 아직 가사를 붙이지 못한 미완의 곡입니다. 남자는 한 번 가사를 붙여보라며 CD플레이어를 건넵니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마르케타는 남자가 건네준 CD 플레이어를 들으며 가사를 지어봅니다. 그러다가 배터리가 떨어지고, 배터리를 사기 위해 아이의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낸 그녀는 상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상점에서 돌아오는 길,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걸으며 자신이 지은 가사를 읊조립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리듬 위로 아련한 노랫말이 흐릅니다. “Are you really here(당신 정말 여기 온 건가요)?” 절절한 노랫말은 이내 절정으로 이어집니다. “If you want me, satisfy me(날 원하신다면, 날 만족시켜 주세요).” 겉으론 단단하지만, 여린 여인의 속내를 털어놓는 그 곡의 이름은 <If you want me>입니다.  


그들은 글렌의 노래들을 녹음하기로 합니다. 음반사에 보낼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것이죠. 마르케타는 다소 무른 글렌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줍니다. 그녀는 글렌과 함께 은행으로 가 대출을 돕고, 녹음실과 프로듀서를 구하며 함께 녹음할 연주자를 모읍니다. 그녀 역시 피아노를 연주하며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작업에 참여하죠. 그녀는 글렌에게 음악적 뮤즈지만, 뮤즈를 넘어 꿈을 향한 길목에서 만난 귀인입니다. 우정이든, 예술적 교감이든, 남녀 간의 연정이든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둘의 관계는 진심 어린것이죠. 실제로도 가수인 두 주인공은 음악 동료이자 한때 연인 관계였다고 하니 영화 속 궁합은 절묘합니다. 키스 한 번 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얘기하는 두 사람은 희망의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글렌과 마르케타의 호흡 외에도 영화 속엔 순간순간 기분 좋고, 볼수록 흐뭇해지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한때 음악가를 꿈꿨던 은행의 대출 담담 직원이라든가, 처음엔 무뚝뚝했다가 열중하는 녹음실의 프로듀서와 그의 카 오디오 테스트, 그리고 아들을 위해 쌈짓돈 꺼낸 아버지 등이 제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고 보면 모두들 실연 9단 글렌을 냉소의 구렁텅이에서 꺼내 희망의 길을 걷는데 일조하는 듯도 합니다. 사람이 극복할 힘을 얻는 건 그런 주변의 작은 응원들이 모일 때라고도 생각해봅니다. 이렇듯 우울한 듯 시작한 영화 속엔 긍정의 기류가 가득 흐릅니다. 어둡고 음울한 면도 음악 작업이라는 경쾌한 흐름 속에 반등시키고, 가끔 과하게 청승맞은 장면마저도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뇌리에 기억됩니다.  


영화 <원스>는 저예산(제작비 약 1억 원대)의 독립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존 카니 감독 스스로 전직 인디밴드 출신입니다. 그리고 배우들은 지인들을 (한때 몸담은 밴드의 리더와 여가수 등) 섭외해 찍은 것이죠. 이것이 모두의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곤 생각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 감독과 아마추어 배우, 부족한 환경 속에 만든 영화니 화면은 때때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달랑 핸드 캠 두 대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해도 가장 소중한 단 한 가지를 가졌습니다. 그 한 가지는 진정성입니다. 솔직하고 진심이 느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밑받침하는 음악이 그 진정성의 이유일 듯합니다. 물론, 연기의 경우 전문 배우의 연기력과 비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연기라고 볼 수 없는 대신 순수합니다.  


뻣뻣하지만 순수한 연기를 갈무리하는 건 결국 그들의 노래입니다. 배우의 뮤지컬과 또 다른, 가수의 뮤직비디오 같은 음악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영화에서 정작 사진에 실망한다면 곤란하듯, 음악 영화 또한 음악이 중요한데, <원스>는 그 음악들이 결정적 한 방입니다.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이 흘릴 것 없이 귀에 들어올 만큼 압권이라 영화적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한편 글렌 핸사드란 실제 싱어 송 라이터가 오랫동안 내공을 쌓듯 쟁여둔 음악들을 대방출한 느낌이 들기도 하니 사실상 이미 엮어진 흙 속의 진주를 목걸이 채로 발견한 기분입니다.  


이렇듯 음악 영화 <원스>는 인디와 상업 영화의 경계에 절묘하게 걸쳐 있고, 세공을 하듯 한 땀 한 땀 다듬은 아름다운 명화들과는 분명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아마추어 냄새 가득 영화적으로는 어설프지만, 진정성이 있고, 이미 준비된 음악들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풋풋한 날 것임에도 그대로가 좋은 보기 드문 영화입니다.




마르케타가 부르던 <If you want me>를 듣는 도중, 제 곁에 앉아 있던 상대가 갑자기 눈을 감습니다. “어지러워…” 저는 선택의 실패는 아닐까 불안합니다. 그 어떤 좋은 영화라도 사람마다 다를 순 있습니다. “… 그만 나갈까?”

“아니야.”

그런데 어지러움은 영화의 흔들리는 초점 때문이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깊숙한 몰입이 가져온 후유증입니다. 아마도 마르케타의 감정에 공감한 듯합니다. 제가 글렌에 몰입된 사이, 상대는 마르케타에 이입된 것이죠. 쉴 틈 없이 휘몰아친 감정 끝에 비로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옵니다. 실내가 밝아지자 저는 동의를 구하듯 곁을 돌아봅니다. 제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번집니다.

마음의 미로 속을 서행하던 나날, 그때 전 지금보다도 더 지루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보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얼마나 지루해질 수 있는 걸까요?) 지루한 건 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자기감정 속에 매몰되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쉽게 상대도 응당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단정했죠. 추상적인 감정만 가득하고 실체는 없습니다. 왜 더 이해하고, 더 교감하며 더 공유하지 못했을까… 그날 제 곁의 그 사람이 마르케타의 노래에서 떠올린 건 제 생각과 다른 뭔가란 건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습니다. 글렌이 옛사랑을 떠올리며 가사를 적듯, 마르케타가 적은 가사 속 you는 마르케타의 you이며 그 사람의 you였을 것입니다. <원스>, 멀지 않아 한때 함께였던 우리의 인연도 거기까지였습니다.  


2008년이었습니다. 이젠 영화관에 갈 일이 없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제가상 후보곡이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하는 진 차마 몰랐습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습니다. 설마… 순간 잡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고 시상식을 보기 시작했죠. 믿기지 않게도 정말 그들이 주제곡 상을 수상하더군요. 한 편의 동화 같았죠. 시상식장의 오케스트라가 나지막이 <Falling slowly>의 리듬을 연주하고, 얼얼한 흥분감 속에 무대에 오른 글렌 핸사드와 마르케다 이글로바는 제대로 된 수상소감조차 말하지 못한 채 단상을 내려갑니다. 글렌은 흥분한 나머지 과장되게 중언부언하고, 마르케다는 급히 자리를 피하려 들죠. 이들이 도망(?) 치자 사회자가 ‘이런 오만한 수상자를 봤냐’며 농을 던집니다. 얼마 뒤에다 다시 단상에 오른 마르케다는 그제야 수상소감을 남겼습니다. 실제 가수들이 영화에 등장했기에 그 장면은 마치 영화에 이어진 얘기처럼 보였고, 꿈을 현실로 이룬 그들의 성공에 함께 기뻐했습니다. 마치 ‘아, 정말 잘 됐구나.’하고 말이죠. 이들이 더 이상 인디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를 만든 존 카니 감독도 이후 <비긴 어게인(2013)>과 <싱 스트리트(2016)>으로 이어지는 좀 더 완성도를 갖춘 일련의 음악 영화들을 내놓게 되죠.

“넌 어떤 노래가 제일 좋았어?”   

영화관을 나서며 묻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때 아마 저는 글렌 핸사드가 부른 곡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여자가 부른 곡이 좋던데…” 지난 일이지만, 저도 좋았습니다. 싫어한 건 아닌데, 그땐 미처 그 곡을 택하진 못했네요. 그 생각에 또다시 다시금 영화를 꺼내봅니다. 사실 이젠 굳이 화면을 보지 않고 음악만 들어도 장면 장면이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본 것을 두고 마치 대발견이라도 한 마냥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와 사운드 트랙이 모자라 <스웰 시즌>의 앨범까지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고 다시 들을 때마다 당연히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고백건대, 그 기억 때문에 한동안 보지 않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습니다.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하고, 누군가는 씁쓸해할 영화의 마지막까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전 글렌의 뒷모습에 넌 참 끝까지 청승이란 듯 미소 짓습니다. 그리고 홀로 되묻죠.


‘그래도 영화는 참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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