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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고량주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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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소설 한 편 읽었습니다. 중국 작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홍까오량 가족>입니다.

제가 <홍까오량 가족>에 이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릴 적 영화를 먼저 접했는데, 소설은 이후 중국과 인연이 생기면서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어릴 적 영화의 인상이 강했는데, 붉은 수수밭의 아스라한 풍경, 공리의 아름다움과 함께 사람 피부를 펴 바르던 잔혹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죠. 아마도 그땐 음울하고 서글픈 시대의 얘기를 좀처럼 직면하지 못했었습니다. 어찌 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의 얕은 곳만 맴돌았다고 할까요. 수없이 화두에 오르지만 차분히 손에 잡지 못했습니다.



읽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첫 페이지 넘긴지 꽤 오래되었는데, 굼뜨디 굼떠 끝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워낙 길고 두꺼운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행간에 멈춰 자주 망상에 빠졌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튀어나가 딴짓도 하다가, 책을 다시 손에 쥐면 급격히 스태미나가 떨어지며 스르륵 잠드는 사이, 어느새 훠이훠이 시간이 흘러 세밑이 되어있더라는 얘깁니다. 그냥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유혹 속에, 속 시원하게 완독했다고 말할 순 없겠습니다만, 읽던 책을 내년으로 이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요 며칠 꾸역꾸역 매듭을 지었습니다. 애당초 들인 시간에 비해 비범한 독서가는 못되어, 방금 다 읽고 책을 덮어도 연도, 인명, 세부 맥락 등이 얼른 기억나지 않고 헷갈려 궁금한 게 생기면 다시 펼쳐봐야 할 듯합니다. 어쨌거나 깡패 같은 무게로 한동안 제 손목을 사정없이 꺾은 이 소설도 끝은 있구나. 기어이 끝을 보는구나 싶습니다.


'홍까오량'이란 중국어 표기로 즉, 붉은 고량(수수)을 뜻하는데, 이 소설의 일부가 중국 영화로 장예모(장이머우) 감독, 공리 (궁리) 주연으로 유명한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87년작 소설, 88년작 영화로 좀 오래되었지만, 영화는 당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고, 원작 소설은 어지간히 중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독서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그건 지금도 유효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용은 격변의 중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고량주를 만드는 집안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룹니다. 혹여 중국이 배경이고, 제목에 '붉을' 홍자가 들어가니, 정서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사실 소설은 딱히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거나 추종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건 소설의 엄연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까오미 둥베이 향촌의 수수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간 격렬한 폭풍우와 같습니다. 다만 소설은 거창한 시대적 사조를 고스란히 읊기보다는, 좀 더 국한하여 그 풍파에 어쩔 도리 없이 휩쓸려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남은 어느 양조가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그럼에도 얼핏 비추는 시대상이 너무 강렬해 도무지 눈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일면 민병의 영웅적인 항일 투쟁사로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소설의 주역이자 화자의 할아버지인 위 사령관(위잔아오)은 딱히 올곧거나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척 속되고 악당적 이력과 풍모를 물씬 풍기는 인물로, 사실 그는 간사한 국민당도 싫고, 엉큼한 공산당 팔로군도 믿지 못하죠. 그러면서도 일제가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던 시기, 가족을 지키고 복수를 위해 민병을 일으켜 영웅적 전투를 이끕니다. 소설에서 가장 잘 읽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개인은 무력하고 세상은 좌충우돌 요지경, 어떡하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를 벌이는 것이죠. 사람과 개의 싸움, 개 같은 사람들과의 싸움, 위험한 적 앞에 분열된 아군. 어쩐지 익숙한 혼돈의 사회상도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들이 마침 술을 빚어내는 양조가라는 건, 무척 공감이 갑니다. 술에 절지 않고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척 서정적인 소설이기도 합니다. 읽다 보면 붉게 물든 잔혹하면서도 장대한 수수밭이 아스라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죠. 한편 수수밭이 상징하는 건, 소설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원래 수수는 큰 홍수가 범람해도 키가 높아서 잠기지 않고 살아남는 작물이라, 그곳이 수수밭으로 가득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수수밭은 곧 세파에 휩쓸린 평범한 사람들 그 자체로, 항상 풍만하다가 격동기를 거치며 꺾이고 잘리고 피로 물들어 인간과 동물의 사체가 수북이 쌓여도( 심지어 이젠 개량되어 맛이 쓴 잡종이 되어도) 여전히 변함없는 수수밭이라는 것입니다. 피로 붉게 물든 수수밭은 언뜻 잔혹해 보이지만, 그 모든 명멸의 과거가 깃든 곳, 뿌리가 되는 곳으로, 작가는 이곳에서 자신의 선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설의 영감을 받고 써나갔다고 합니다.


한편, 소설의 시점이 무척 독특한데, 화자는 당시 아버지의 시점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더 나아가 증조부모와 외증조부, 그리고 둘째 할머니 등의 '라떼' 썰을 들려줍니다. 때로 할아버지인지 아버지 얘긴지, 어머니인지 둘째 할머니 얘긴지 혼동되며 수시로 헷갈리고, 번역의 묘가 더 필요해 보일듯하지만, 그것으로 소설다운 긴장이 더 유지되는 면도 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면 그냥 옛날이야기가 될 뿐이죠. 특히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에 관해 들려주는 화자의 어투에서 여러 가지 재미가 유발되는데, 울다가 웃는다고, 이 소설은 처절한 가족사와 엄혹한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끊임없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해학으로 넘쳐납니다. 대하소설이니 빨리 잘 읽히다가도 호흡이 길어지는 부분도 있기 마련인데, 길고 두꺼워 손목이 꺾이면서도 그런 촘촘한 유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완숙한 이야기꾼의 글인 것이죠. 다 읽고 나니 뿌듯합니다.



그밖에 이 작품에 대한 상세하고 훌륭한 해설은 많습니다. 중국어를 좀 배우며 문화 강좌까지 이수해야 했던 제 경우, 읽기도 전에 배운 게 이 작품의 해석이기도 했죠. 그래서 그런 해석보다 좀 더 개인적인 감상을 얘기해보자면, 이 작품은 저에게 지난 중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붉은 수수밭>이란 영화를 보았던 90년대, 어쩌면 21세기 중국의 문화는 빛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대혁명, 공산주의의 실패로부터 개혁 개방으로 가는 사이, 중국이 가진 많은 자질이 빛날 가능성을 보였고, 문화 방면도 다르지 않았죠. 그럼에도 당대 중국 본토의 작품에 대해서는 신뢰가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옛 역사 소설이라면 모를까, 영화도 홍콩 영화에만 흥미가 있었죠. 그러다가 중국 영화가 여럿 반짝했습니다. <붉은 수수밭>도 그 가운데 하나였죠. 중국 본토의 콘텐츠에도 조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주 전공인 인도보다는 좀 더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인도보다 당시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콘텐츠가 더 풍부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중국 본토의 작품들은 좀 실망스럽습니다. 정체되어 있거나 오히려 퇴보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데, 시장은 커졌고 남 눈치 보지 않는 내수로도 충분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우물 안 개구리 같습니다. 생각이 자유롭지 않은 곳에서 인재와 자원이 풍부한들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은 나오지 않겠죠. <홍까오량 가족>을 읽으며 과연 이 같은 소설이 중국에서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공산당에도 냉정한 시선을 던지는데, 만약 지금의 중국에서 출판되었다면 자칫 반 체제적이라는 낙인이 찍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행히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중국은 마침 변화가 필요한 시대를 맞았고, 영화는 황금곰상을 받았으며, 소설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이 작품을 두고 뭐라 하기는 긁어 부스럼입니다. 당시로써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의 깊은 면모를 대외적으로 보여준 공도 있습니다.



반면 지금의 중국은 다릅니다. 덩치는 여전히 커도 속은 좀 좁아졌습니다. 문학은커녕 모든 창작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아 보이고, 작가의 사상 검증도 엄격해 보이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체제의 위기란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혁 개방의 궁극적 이상이란 결국 중국식 사회주의의 완성이고, 인민 모두가 잘 살아야 하는데, 시장 경제를 도입하며 일부 잘 살게 되었지만, 궁극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은 이상일뿐이라 실현되기 어려운데, 그에 반해 빈부 격차 속에 기회는 줄고 부패와 적패가 쌓여 혜택을 못 가진 자들의 불만은 늘어가죠. 중국의 경우 끝내 제어하지 못한 인구도 더 늘었습니다. 그 불만은 고스란히 정부로 향하고, 중국은 사실상 공산당 일당이니, 중국 공산당은 체제의 위기감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분쟁, 코로나 이후 등 대외적 문제는 별개로, 만리장성은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제하며 또 다른 이상향을 내걸고 내부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최근 중국 공산당의 행보는 실로 결사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역사상 중국 같은 곳에서 하나의 왕조가 그리 길게 버티진 못한다는 위험한 교훈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정말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야심(그 또한 달콤한 꿈이긴 하지만)보다 또 하나의 (이번엔 대외적인) 이상을 내세워 내재한 불안을 밖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마침 그런 프로파간다에 잘 활용하는 것이 문화 콘텐츠일 것입니다. 촌스럽다. 안하무인이다. 이래선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고 비평해도 밖에선 어쩔 수 없습니다. 문학이라면 그런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풍자해야 할 텐데, 문화 대혁명은 지성인의 세대적 절벽을 만들었고,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은 인물이 있더라도 고향을 등질 생각이 아닌 이상 누가 감히 <홍까오량 가족>의 위잔아오처럼 "난 너희가 싫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부에서 목소리가 자연스레 터져 나오지 않는 이상, 중국의 문화적 잠재력도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 모옌은 이후로도 고향을 배경으로 한 글을 쓴다고 합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아직도 고향 얘기냐고 촌스럽다고 평한다는데, 제가 맘대로 짐작해 보기엔 그 엄청난 필력에도 굳이 고집하며 무대를 고향으로 한정시키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말처럼 고향이 소설적 정기를 받는 근본이기도 하거니와, 굳이 더 넓은 무대로 판을 키워 작가 스스로 원치 않는 시대적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의도는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지금 당신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난 그냥 고향 얘기를 할 뿐이라고 답하면 되니까요. 뭐, 과도한 억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족을 통해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게 소설의 한 방식이라면, 그저 하나로 열을 상상해보는 것도 독자의 자유니까, 어쭙잖은 감상이라며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문득, 작가가 묘사한 공간을 찾아가서 고량주 한 잔 마시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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