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대국의 거짓말 ④] 중국의 축구, 인도의 성형술


*사진 : 힌두교의 신 가네샤


공을 발로 찬다고 축구의 기원이 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원래부터 무엇인가를 던지고, 차고 달리며 진화되어 왔다. 단지 차는 것 만이라면 이미 고대 문명부터 나타나는 유희 형태다. 그럼에도 중국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쿠주’가 축구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집단이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중국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무조건 지지하기도 했다. 중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입장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영국, 이태리 등 서구의 ‘축구 사관’에 대해 굳이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영국을 축구의 종주국이라고 하면 그 또한 서구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중국이 아니더라도) 동양이 축구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건 왜 안 되냐고 반문해볼 수 있다. 다만, 이건 말이 아닌 마음의 공인을 받아야할 문제다. 단지 공을 차는 행위와 발전된 형태의 현대 스포츠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기원을 분별하기 어려울 야구 같은 스포츠도 던지고 치니까 우리가 먼저 했다고 할 것인가? 차라리 쉽게 납득하지 못할 축구보다 동양 문명의 다른 우수성을 알려야 옳지 않나 생각해본다.


한편 중국은 나름의 속셈이 있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함께 인구가 많은 사회주의 빈국에서 탈바꿈하여 오늘날의 강국이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정치적으로 패쇄적인 국가인데, 시장 경제의 도입의 수혜가 연안 및 거점 도시들에 몰렸고, 불가피하게도 부의 편중 현상과 빈부의 격차를 야기해왔다. 그 갈등은 점차 첨예화될 가능성이 크다. 등소평 국가주석 또한 지금 중국이 직면한 이 시점부터가 개혁의 고비라고도 했다. 점-선-면이란 청사진에 따른 집중적인 성장과 점진적인 분배를 계획했지만, 시골과 도시의 불균등은 갈수록 커지고, 이상적인 사회 건설의 목표는 아직 모호하다. 파이를 크게 키웠지만 아직 충분치 목하고, 그 과정에 사회적 불만도 잉태되었다.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는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정진하지만, 그 이후는 짐작하기 어렵다.


욕구의 다양성도 문제가 된다. 생각과 표현의 자유도 갈수록 제어하기 힘들다. 그런 가운데 국가 단결을 위한 하나의 보완책이 중국의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받침이 될 만한 연구에 장기간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공을 들이며 분열의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필히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키워나가고 그러한 교육 방향이 국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이론적인 사상의 실현으로 통치술을 발휘하는 이런 방식은 참으로 중국적이다. 물론 이 또한 언제까지 유효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현재는 통한다는 점이 주효하다.

한편 그런 중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의도도 헤아릴 수 있다. 사실 중국 시장 잠재력을 본 세계가 그런 찬스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그렇게 믿진 않지만, 맞다 무조건 옳다는 제스처는 중국의 마음에 들어야 중국에서 무언가 동참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어찌하였든 정말 축구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말이 공인 받으려면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 근거가 분명하게 나와 정말로 세계인이 인정하거나, 이와 같은 주장을 기록하고 자료로 남겨 놓고 수백 년 고수해 그걸 실제 역사화 하는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은 굳이 부언하지 않겠다. 감히 말하지만, 그들이 후자를 노리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과 관련된 역사, 영토 문제도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바라봐야할 대목이다. 일종의 밑 작업 아닌가?

한편 중국만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건 아니다. 인도 역시 요즘 중국을 곧잘 벤치마킹하는데, 체제는 다르지만, 국가의 사이즈 면에서 같은 대국 중국의 국가 계획을 눈여겨보지 않을 리 없다. 먼저 한 가지 인도의 특성인 ‘용광로’라는 말을 언급해야할 것이다. 인도 사람들이 영민한 면은 중국보다 느리지만, 뒤 따라가며 연구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좀 다른 예지만, 종교를 통해서도 인도는 그런 본능을 갖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령, 불교는 힌두교와 뿌리를 같이하지만, 상 하위 계층의 계급 차별에서 출발해 만민 평등을 주장하며 힌두교(정확히 말하자면 지배 계급)를 위협하지 않았나? 그때 인도는 불교를 지며보고 포용 및 흡수하여 결국 힌두교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사실상 인도 대륙에서는 미미한 종교로 만들었다. 이슬람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의 문화적 영향력과 지배력이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이슬람이 인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인도 안에 이슬람 문화가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밖에 문화 충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인도의 힌두이즘 즉, 힌두교의 용광로와 같은 포용력, 그리고 중국의 중화주의 사상이라는 각기 다르지만, 공통의 목적을 가진 대륙적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대륙 중심으로 빨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이다. 속되게 말해 요즘 말로 다소 깔때기 같은 것이다.


다시 인도 이야기로 돌아가 인도 역시 중국의 축구와 같은 기원설이 등장하고 있다. 가령 비행기는 라이트 형제가 아니라 고대 인도에서 이미 개발되었다는 것인데, 인도의 대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비행체에 대해 처음 언급이 되었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개발한지 8년 전인 1895년에 쉬바카르 바부지 탈파드(Shivakar Babuji Talpade, 1864 – 1916)라는 학자가 무인 비행체를 날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마야나>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그 내용 속에 신들이 타는 비행체로 바하나(탈 것)들이 등장 하는데, 그것이 비행에 대한 상상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하바라타에서도 바하나가 등장하는데, 마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마하바라타를 모티브로 한 인도 소설인 <더 마하바라타 시크릿>에서는 바하나를 아예 현대의 대량살상무기에 비유하며 이 무기를 차지하려는 쫓고 쫓기는 싸움을 그린다. 고대 신화까지 가면 기원전 5000~7000년까지 거뜬히 거슬러 올라가므로 라이트 형제가 이길 수 없다.

신화나 전설, 그리고 픽션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하지만, 그들에겐 말이 된다. 아니, 말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교육받고 믿을 것이란 것이 핵심이다. 그들조차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도 사람들도 의도를 꿰뚫어 보고 우리도 (중국처럼) 좀 그럴 필요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삶과 종교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도인들에게 원래부터 대서사시는 경전이다. 즉 그 바이블을 바탕으로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불러일으킨다면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도인을 하나로 모으는 결집이라고 할까? 물론 이는 인도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 중심의 결집이기도 하다. 그러한 종교적 의도도 숨어있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말이 되는 일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어도 13억 인도인 마음속에 신이냐 라이트 형제냐를 두고 고르라면 라이트 형제가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물론 아직 1895년의 무인 비행체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 대서사시들이 이런 발언이 교육부 인사 (청소년 교육부 장관, Junior education minister) 측에서 나온 점도 재미있다. 중국도 학자를 통해 동북 공정을 주도했듯 인도도 비슷한 공정(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큰 대국을 하나로 묶는다는 동일한 목적이지만, 그 이유는 좀 다르다. 중국은 느슨해질 수 있는 중국을 하나로 모으고, 또 ‘21세기 중화사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한 밑 작업이라면 인도는 자부심이자 성장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기도 하는 다양성에서 인도라는 하나를 결집하기 위한 작업이다. 쾌속의 성장을 이룬 중국을 곁에서 바라보며 인도는 부럽다. 그리고 자신들에 맞게 배워나간다. 중국이 잘한 것은 인도도 인도에 맞게 받아들이는 건 마찬가지다. 다민족 국가인 인도에서 중국의 민족주의는 다르게 적용된다.


이에 대한 결정판은 아마 성형술에 관한 인도의 주장일 것이다. 인도의 신 가운데 아이의 몸에 코끼리의 얼굴을 붙인 가네샤(코끼리 신)가 있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시바 신이 자신의 아이인줄 모르고 어머니를 보호한다며 건방을 떠는 아이 목을 실수로 자른 다음 아내의 극성에 얼른 가까운 생명의 머리를 붙인다는 것이 가네샤가 되었다는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힌두교 신의 전설이다. 그리고 그 가네샤 신이야말로 바로 성형에 대한 최초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응용력도 중국 못지않게 대단하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놀라운 가설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가 비판적일 수만은 없다. 그 이면의 장기적인 계획과 의도를 안다면 놀랍고, 무섭게 여길 만한 일이다. 한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생각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건 민첩성일 것이다. 우리에겐 그것을 대륙의 허풍이라고만 보지 않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신 #가네샤 #중국 #힌두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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