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센티멘털 인디아 ⑫] 깨 빠스 개똥철학

인도 힌디어엔 소유를 뜻하는 별개의 동사가 없습니다.
대신 후치사란 걸 이용한 별도의 구문으로 그 의미를 대체하는데, 누구 곁(근처, 가까이)에 무엇이 있다는 식의 ‘깨 빠스’ 구문을 써서 소유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대로 써보면… 내 곁에 돈이 있어! 20세기 신파극처럼 좀 대사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소유가 부자연스러운 건 아닐까 싶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혹 그런 식으로 무소유의 미덕을 높이는 건 아닐까 꿈보다 해몽해봅니다. 다만, 언어에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표현 법 없이 은연중에 표현한다면, 과연 그 사회의 느낌이 대충 그러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인도에 다니며 곧잘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까짓 좀 없으면 어때?’
종교의 나라, 수행자와 탁발승, 거리의 숱한 부랑자와 앵벌이들… 인도의 풍경이 무소유의 마음을 싹트게 만듭니다. 그래 없는 나도 괜찮다는 위안을 얻게 되죠. 완전히 없으면 안 되니 최소한의 미니멀리즘도 괜찮죠. 인도에 머무르는 내내 검소해지고 소유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혹 무소득을 무소유로 착각하는지도 모르죠. 손을 벌리고 제 주위를 에워싸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매레 빠스 네히! / 내 곁엔 없어!
하지만 인도에서 득한 무소유의 진리는 귀국 후 짧게는 일주, 길게는 한 달이면 깔끔히 잊히지는 것이었습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마치 환절기의 계절병처럼, 다이어트의 요요현상처럼…
사실 인도는 무소유의 나라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유의 나라이지만 무소유를 사색할 뿐이죠. 어쩌면 (예와 도가 없어 예와 도를 논하듯) 소유가 중요하니 무소유를 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인도 어디에도 실상 소유에 대한 지침서는 없습니다. 다만, 인도로 향한 우리의 눈에 그런 모습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나체 수행자가 있지만, 모두 그런 수행자가 될 순 없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인도는 윤회의 나라일 겁니다. 생과 생 사이에 업(까르마)을 쌓고, 그 업으로 또 다른 생으로 향하는데, 업을 쌓는 일도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좋은 업을 쌓아 가면 언젠간 윤회의 사슬을 끊고 구원될 수 있겠으나, 당장은 일단 선업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 선업을 쌓는 고난도의 방법 중 하나가 고행이고 무소유의 수행일 수 있겠습니다. 설령 제가 다음 생에 개똥벌레로 태어나도 빛은 소유한 셈입니다. 매일 밤 엉덩이를 실룩이며 빛을 밝힐 것이죠. 그 또한 소유입니다.
전 소유의 인간입니다. (적어도 아직은) 결국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습니다. 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소유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세상 속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옛사람처럼 실크로드를 걷지 않는 이상 무소유의 인도로 향하는 길도 여비가 필요합니다(아차! 용케 죽지 않고 걸어갈 수 있더라도 비자를 가져야 하겠군요). 소유의 시대에 무소유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듯합니다. 다만 바람직한 소유를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것이 아닌 내게 필요한 것을.
그런 이 생애의 어느 날… 은근 ‘깨 빠스’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은 마침 사랑이 하고 싶군요. 고백해 봅니다.
매라 딜 뚬 깨 빠스 헤! / 내 마음은 네 곁에 있어!
역시 어색해…
적어도 이 방면은 앞으로도 계속 무소유 할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