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센티멘털 인디아 ⑮] 길을 기억하다

‘우리는 매일 모든 것과 이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시야는 더욱 넉넉해지리라.’
- 시바타 쇼 <청춘> 중에서
수년간, 그곳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났습니다. 어떻게 그곳을 잊을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족쇄가 풀린 기억은 놀랍도록 생생합니다.
정수리로 뙤약볕이 내리쬐고,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날입니다. 정오를 넘어 그곳에 도착한 제 그림자는 인체 발화의 미스터리처럼 바닥 아래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그림자를 버리고 나선 전,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곧장 릭샤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외쳤습니다. 평소처럼 값을 흥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될 대로 돼라!”
“잘디 잘디(빨리빨리)” 약속에 늦거나 무언가에 쫓겨 서두른 건 아닙니다. 이렇게 더운 날이면 빠르게 달릴수록 사방이 뚫린 릭샤 안은 시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길을 내달리며 릭샤의 검은 매연과 하얀 흙먼지의 오묘한 조화를 한껏 맛보며 땀을 식혔습니다. 주위를 돌아볼 기력이 생기자 바깥 풍경이 보입니다. 선탠을 너무 오래한 듯 세상은 온통 백색이었습니다. 과(한) 노출입니다. 길가에 드리운 비치파라솔도 보였습니다. 백색 세상 속 유일한 그림자를 드리운 곳입니다. 이런 날이면 반라의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이나 비키니 미녀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붉은 승복으로 온몸을 휘감은 스님들만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스님들이라고 근엄할 수만은 없는 듯합니다. 삼삼오오 길을 가던 젊은 스님들은 길가의 물 펌프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순간 그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스님들이라면 그저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한다고 누구도 가르친 적 없습니다. 다만 막연한 생각 속에 어느새 그런 관념이 자리 잡아 있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설익은 자기 관념 속에 가둔 꼴이니… 돌이켜 보면 무지의 강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무지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니 조금은 보입니다. 호스를 잡은 한 스님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다른 스님들에게 물을 뿌립니다. 모두가 흠뻑 물을 끼얹었지만, 모두의 입가에 맑은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고 번뜩이는 물줄기에 어렴풋이 무지개가 떠오릅니다. 나는 웃습니다. 어느새 더위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별했던 기억과 재회합니다. 가야에서 부다 가야로 향하던 길, 한 줌 습기 없이 더운 날, 흙길을 달리며 물장난을 치던 젊은 승려들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