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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채

[센티멘털 인디아 ⑯] 로테를 찾으셨습니까?


로테의 환영이 사라지자 저는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집니다. 사람의 말, 마음 또는 어떤 장소… 세상의 모든 것엔 표면과 이면이 있다지만, 막상 그 이면과 마주하니 평정심을 잃습니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오랜 세월 변함없는 찬사를 받아온 건, 아마도 베르테르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도 각자의 로테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의 열정은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보냈던 무수한 편지처럼 절절하기에, 베르테르의 슬픔은 곧 우리의 슬픔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연서를 쫓다 보면 어느새 몰입되어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은 어느새 로테가 되어 가슴 어딘가에 자리 잡고, 그렇게 연모하며 마음을 키워나가다가 그 대상은 실제를 초월한 환영이 됩니다. 한 장소에 대한 감정 또한 다를 바 없을 듯합니다. 가보지 못하는 사이 그곳에 관한 사진과 이야기를 접하며 어떤 기대감을 품게 되고, 그 기대감이 오래될수록 실제 이상의 환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리는 언젠가 비로소 그 장소와 대면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느낌일까…’ 저도 모르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 대한 갈망이 깊으면 가보지 않고도 익숙해지는 장소가 그렇듯, 자이푸르는 어느새 제 환영 속에 자리 잡은 로테가 되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다가서자 그곳은 생각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딱히 꼬집어 무엇이 달랐는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실제보다 깊어진 환영 탓일 것입니다. '바람의 궁전'은 화려한 표면과 다른 이면의 모습으로 마치 도시의 복선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길 위에 존재할 만한 모든 것이 뒤엉킨 ‘핑크시티’의 혼잡한 도심을 걷는데, 이유 모를 회의와 공허감에 빠졌습니다. 오랜 시간 한 사람에 대한 연정을 품다가 그 연정이 극도의 갈망으로 달아오를 찰나 그 사람을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의 감정… 그 감정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어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인도에 이르러 비록 여정은 힘들어도 발을 내딛자 떠나고 싶단 마음부터 가진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혹 단지 지쳤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마땅히 겪어야 할 여행의 첫 권태기를 이제야 겪는 것이고, 자이푸르는 불운한 희생양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계획과 달리 이곳에서의 여정은 줄어들 예정이었습니다. “어디 좋은데 없을까요?” 오토 릭샤를 잡아 탄 저는 릭샤왈라에게 물었습니다. 대개는 질문 없이 무뚝뚝하게 목적지를 던지던 저에겐 드문 일이었습니다. 핑크시티를 벗어나 암베르 포트와 자이가르 포트로 향하는 길목에 좋은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으로 서둘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끝에야 반전이 있습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예상 못한 순간 불현듯 일어나는 반전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내게 돌아온 사람처럼, 절망의 끝에 희망이 보입니다. 하지만 배수의 진이 차선의 전략일 뿐이고, 간절한 소망일수록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반전을 기대하며 자신의 운을 시험할수록 기적은 이뤄지지 않는 듯합니다.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상치 못해야 합니다. 기대하지 못한 순간, 그곳이 눈앞에 들어왔습니다. 제 표정을 살피던 릭샤왈라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길가에 릭샤를 멈춰 세웠습니다. 호수에 낡은 궁전이 떠 있었습니다. 마치 자이푸르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섣불리 실망하지는 말기를…” 어쩌면 진정한 아름다움, 경이로움… 원더(Wonder)란,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보지는 않아도 수없이 상상해온 곳, 그래서 익숙해져 버린 곳은 실제 마주한 순간 생각만큼 인상 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타지마할에 실망하는 사람을 보았고, 그러므로 영화의 예고 편조차 보지 않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실망할까 봐.

어쩌면 자이푸르의 아름다움이란 애초 ‘핑크시티’이나 ‘바람의 궁전’에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의 아름다움은 보이는 표면보다 이면에 존재하며, 그곳을 찾는다면 우린 비로소 로테를 만나게 되는 것일 테죠. 각자의 로테는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호수 위의 버려진 궁전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름은 '잘 마할'입니다.

그곳은 당시만 해도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의 마음은 이심전심인 모양인지, 세월이 흘러 다시 찾았을 때는 호숫가를 따라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옛 추억과 더불어 여전했지만, 묘하게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습니다. 저는 또 다른 원더를 찾아 릭샤에 올랐습니다. 이제 릭샤왈라는 저를 언덕길로 이끌었습니다. 삼발이 오토바이가 털털 검은 연기를 뿜으며 산길을 오르는 사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예전 언젠가에는 ‘핑크 시티’나 ‘바람의 궁전’을 본 사람들도 그곳을 인도의 진정한 이면으로 보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실제의 인도, 인도의 이면 접한 당신은 만족할까요? 실망하게 될까요? 혹 생각도 못한 의외의 장소를 찾게 될까요?

인도에서 부디 당신의 로테를 만나길…

#여행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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