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센티멘털 인디아 ⑰] 답장은 오지 않는다

떠나기에 앞서 편지를 씁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아직도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건 소소한 행복입니다. 답장을 기대하진 않습니다.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주소를 빌릴 뿐 돌아오지 못할, 돌아와선 안 될 편지입니다. 반송이 무의미한 주소란은 비워둬도 무방할 테지만, 낯선 곳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될 이의 표정을 상상하며 꼼꼼히 채워 넣습니다. 편지를 쓰는 곳은 어느 기차역의 예약창구입니다.
재회가 늦었습니다. 시간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고, 다짐한 것보다 긴 세월 만에 비로소 다시 이곳에 이릅니다. 그 사이 저는 변했습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어리석었습니다. 사람은 바뀔지언정 인도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달라져도 무언가 여전하며 낯이 익습니다. 아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을 테지만, 오랜 시간 묵묵히 지켜보지 않으면 그 변화를 정의하기란 어려운 곳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만난 인연도 어쩐지 여전할 것만 같습니다.
이곳에 이르자 무언가를 찾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날도 지금처럼 기시감이 있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인파 속에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죠. 물론 그때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걸 알지만 설마 하며 은근한 기대를 품어봅니다. 눈길이 어느 한 곳에 멈춥니다.
시선이 멈춘 곳은 낡은 탁자입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하는, 기둥 한 편에 마련된 대수롭지 않은 탁자입니다. 떠나기 전 다시 한번만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정말 그곳에 있었습니다.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처음 운명이라는 걸 믿게 되었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뤄질까요? 우연의 반복이 운명이고 운명이 우연의 장난이라면, 적어도 그때만큼은 운명과 우연의 거리는 지척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며 증거 불충분의 향수 탓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거기서 다시 만나?’ 추억의 미화가 불러낸 기억의 오역, 그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저 또한 한동안 무수히 검증해 보았습니다. 이곳에 쉽사리 닿지 않을 기억의 성지를 세운 것은 아닐지… 특별할 것 없는 장소입니다. 기차역, 예약 창구, 무수한 인파가 오가는 일상적인 공간. 하지만 기억이 장소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재회의 기억이 담긴 그 아무 곳도 아닌 장소는 제 영원한 순례지가 됩니다. 기분 탓일 진 몰라도 탁자도 예전 그대로인 듯합니다. 그곳을 바라보며 이젠 사라진 옛 운명의 실루엣을 그려봅니다.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열차를 예약하고, 떠나기에 앞서 편지를 씁니다. 어디든 다음에 거칠 우체국에서 부칠 생각입니다. 인도에서 편지를 보내는 건 미덥지 못합니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은 편지가 제대로 갈지부터 의문입니다. ‘아직도 그곳에 살까?’ 기억을 더듬어 확신 없는 오랜 주소를 적어 봅니다. 주소조차 불확실한 편지가 마땅한 목적지에 이를 것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내심 가지 않길 원할지 모릅니다. 예전엔 돌아오지 못할 편지였다면, 이젠 받지 못할 편지입니다. 이곳에 다시 와본다는 것, 편지를 쓴다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답장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