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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채

[인도 이야기 가이드]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어요


힘은 신에게서 사제로, <브라흐마나(범서)>

어릴 적 믿지 못한 말이 하나 있다.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어요.”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좀 이상적이다. 뭐랄까… 인앱 구매 없인 한계에 이른 무료 게임 같다고 할까?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공부의 신이다. 하지만 공신도 많으면 신이 아니다. 아무나 그럴 수 없으니 희소성의 가치가 있어 신이라 불린다. 어지간한 사람은 교과서만 가지곤 부족하고, 이런저런 참고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참고서는 나쁜 게 아니다. 결국 깊은 지식을 쌓으려면 더 많은 것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교과서만으로 성공한 공신이 있다면 정작 그 노하우를 담아 또 하나의 참고서를 펴낼 일이다. 그래서… 난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교과서 이상으로 이런저런 참고서에 더 눈길을 주었다.

<브라흐마나(범서)>를 생각하자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베다>가 교과서라면 <브라흐마나>는 참고서 같다는 느낌 때문일까?

일단 교과서가 없으면 참고서도 없다. <브라흐마나>에 앞서 <베다>를 간단히 상기해야 할 이유다. 각기 무관한 게 아니라 <베다>에 이어 <브라흐마나(범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전후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베다>는 이미 언급한 대로 4개의 결집서로 요약된다. 그 시작으로 아리아인이 인도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담은 <리그베다>, 종교의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야주르베다>, 인도 음악의 효시 <사마베다>, 개인적 욕망과 관련된 주술서인 <아타르바베다>로 인도의 역사이자 종교, 사상, 문학 등 문화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중 종교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야주르베다>는 운문 외에 산문도 담고 있는데, 사제들이 읊은 그 산문에서 <브라흐마나(범서)>가 비롯되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역사보다 오랜 신들의 이야기 <인도는 이야기다>

제사의식에 조예 깊은 사제들이 관련 내용을 설명한 것을 모은 해설서가 곧 <브라흐마나>인 것이다. 또한 <야주르베다>의 산문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인즉슨 석가모니 시대 이전부터 수세기에 거쳐 형성된 결집서고, 무언가 장기간 생성되었다는 건 필연적으로 여러 갈래의 계파로 갈려 발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브라흐마나> 역시 그렇다. <베다>의 4개 결집서에 따라 다양한 <브라흐마나>가 나왔는데, 제사의식이 다른 각각의 계파마다 다른 <브라흐마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바베다>에 따라 다르고, 그 또한 다시 세분된다. 어두컴컴한 깊은 우물 속에 들어온 듯하지만, 인도를 일컬어 대양으로 향하는 깊은 우물이다. 그것을 이름 위주로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① <리그베다> 관련 <브라흐마나>

- 애타레야 브라흐마나

- 코우쉬타키(또는 산카야나) 브라흐마나

② <야주르베다> 관련 <브라흐마나>

- 사트파타 브라흐마나 (<슈클라 야주르베다>와 관련)

* <리그베다> 다음으로 방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담아 <브라흐마나>에서 가장 중요

(마지막에 <리그베다> 이후 가장 유명한 <브리흐다란야크 우파니샤드> 포함)

- 타트리야 브라흐마나 (<크리슈나 야주르베다>와 관련)

③ <사마베다> 관련 <브라흐마나>

- 탄다마하(또는 판차빈사) 브라흐마나

- 사드비사 브라흐마나

- 재미니아 브라흐마나

- 그밖에 대바타, 아르세야, 사마비단 등

④ <아타르바베다> 관련 <브라흐마나>

- 고파타 브라흐마나

각각의 내용 이전에 일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베다>부터 살피지 않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도는 교과서를 건너뛰고 참고서만 봐선 풀기 어려운 난제다. 어쨌든 이 모두가 의식에 관한 해석으로 <브라흐마나>는 <베다>의 상징적 의미를 광범위하게 설명한 것이다. 가령 제사의식의 근원과 원리, 기도문과 의식의 관계, 의식에 참여하는 사제, 그 의식으로부터 얻는 효과까지 망라한 것이다.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며 지역마다 홍동백서의 의견이 엇갈리듯 지역과 믿음에 따라 그 해석과 의견이 다양한 것 또한 당연하다. 이처럼 <브라흐마나>는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문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제사의식에 관한 문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정치, 사회, 철학적 이야기를 포함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신 외에 역사적 인물을 다루며, 문법, 음성학, 점성학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귀한 자료다.

하지만 <브라흐마나>가 <베다>의 참고서인 것만은 아니다. <리그베다>와 <브라흐마나> 사이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리그베다>에선 신들이 영향력을 가졌다면 <브라흐마나>에 이르러서는 중재자인 사제들에게 그 힘이 옮겨간다. 제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데, 제사의식 또한 정립되어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의식을 집도하는 사제만이 알고,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할 지식을 아는 그들이 곧 힘을 얻은 것이다. 아는 것이 힘. 사제의 권위가 높아진다.

한편 <브라흐마나>에서는 <리그베다>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자연 신들 대신 비슈누, 시바 등 인격신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데, 이 또한 힘의 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경이로운 능력을 가졌으며 좋은 의미를 지녔던 ‘아수라’가 악마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또한 인드라(비) 대 브리트라(구름)의 싸움은 의미가 퇴색되고, 점차 신과 악마의 투쟁 구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힘의 이동에 따라 신앙의 관점이 조정된 것이고, 점차 우리가 아는 인도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이 신보다 우위에 있고 인간이 신보다 우월하다는 철학도 여기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의식과 절차를 중요시하고 그 지식을 (널리 알리는 대신) 한정된 집단 내에 전승하며 독점적인 지위를 획득하자 점차 이론을 가다듬어 사상과 철학을 정립하며 사회의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 <브라흐마나>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레슬링으로 보자면… 권력의 굳히기 기술 같은 것일까? 이로써 인도는 <리그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로 접어든다.

그래서… 그토록 참고서를 좋아한 나는 어찌 되었을까?

교과서보다 참고서의 내용이 더 풍부하긴 했다. 그렇다면 참고서만 봐도 충분하겠지 싶어 시험 기간이 되자 교과서는 덮어두고 참고서만 팠다. 그리고 학기말 시험, 앞좌석부터 넘어온 시험지를 받은 난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마치 공신의 가르침을 따르듯 너무나도 곧고 순결했던 그 시험… 시험 문제는 교과서의 몇몇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은 채 곳곳에 가로를 쳐놓은 것이었다. 주관식, 아는 대로 가로를 모두 채우시오. 그러니까 중요한 명사뿐 아니라 (잔인하게도) 사소한 것까지… 아뿔싸! 교실 이곳저곳에서 신음소리가 비어져 나오자 단상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어때? 시험 참 쉽지? 내가 말했잖아. 교과서만 열심히 파라고.

역사보다 오랜 신들의 이야기 <인도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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