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채
[인도 이야기 가이드] 나는 자연인이다
숲에서 자란 삼림서(森林書), <아란야크>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멈춘다. <나는 자연인이다>, 깊은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자연인은 오늘도 분주하다. 항상 챙겨볼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좀처럼 눈을 떼기 어려운 프로그램이다. 그저 기인의 삶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묘한 울림이 남기 때문이다.
자연인들은 자연인이 되기까지 각자 사연을 품고 있다. 스스로의 삶이지만 그 삶의 무게를 자신의 품에 온전히 짊어지기 어려울 때, 그들은 자연의 품을 찾아갔다. 처음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만 잊자, 포기하자… 누군가는 더 극단적인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숲은 사색의 공간이고 혼자만의 시간은 길었다. 물론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한 숲 속의 일상 또한 몹시 분주하지만, (밖과 달리 안이 공허했던) 도시의 삶과 달리 자연의 삶은 안팎이 모두 튼실한 과일과 같다. 분주한 가운데 생각은 매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조차 생각에 골똘한 것으로 보일 만큼… 그렇게 생각을 곱씹고 가다듬는 사이 자연인은 스스로 단단해진다. 물론, 수행과 득도 운운하며 미화하려는 건 아니다. 고대 철학자에겐 어울리지만 오늘날 ‘자, 숲으로 갑시다!’라고 할 순 없다. 다만, 다다르지 못한 생각의 심연에 이르기 위해 누군가는 끝없이 칩거하고 또 누군가는 ‘철학자의 길’을 거닐 듯, 자연인들도 홀로 끊임없이 사색하는 사이 스스로 어떤 경지에 이른 것이 닮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생각의 소비가 아닌) 생각의 깊이에서 진일보하므로 자연인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게 된다.
사실 인도의 사상가들도 자연인들과 같았다. 만약 (그럴 리 없지만) 자연인이 자신의 전생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선생은 고대 인도의 사상가였다’고 답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숲에서 살던 사상가들이 조용히 깊은 사색(명상)에 빠져 더 높은 지식의 수준과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결과물이 <아란야크>인데, 삼림서(森林書)라는 명칭처럼 숲에 살던 사상가들의 사색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브라흐마나>가 <베다>의 ‘참고서’라면, <아란야크>는 <브라흐마나>의 ‘부록’에 해당한다. 현재 7개의 <아란야크>가 남아 있는데, <베다>를 해설한 <브라흐마나(범서)>에서 확대된 것이 <아란야크>로 마찬가지로 <베다> 결집서마다 각각의 <아란야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브라흐마나>처럼 제사의식에 관한 규칙은 다루지 않고, 사색을 통해 제사 의식이 가진 의미와 중요성 등에 대한 이해를 산문 형식으로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제사의식의 형식이 아닌 그 의식에 내포된 정신을 좇은 것인데, 이러한 <아란야크>가 ‘영혼(아트마)’에 대해 일깨우고, 이로써 (업 중심) 사상과 (미망사) 철학이 발전한다.
① <리그베다> 관련 <아란야크>
- 애타레야 아란야크
- 코우쉬타키 아란야크
② <야주르베다> 관련 <아란야크>
- <슈클라 야주르베다> 관련 <아란야크>
=. 브리하다 아란야크
=. 매트라야니 아란야크
- <크리슈나 야주르베다> 관련 <아란야크>
=. 태티리야 아란야크
③ <사마베다> 관련 <아란야크>
-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 재미니아 우파니샤드

앞서 <브라흐마나> 편에서 소개한 바 있듯, <리그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로 넘어가며 인도 사회는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과 권력은 신에게서 제사의식의 지식을 가지고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에게로 넘어갔고, 또한 신의 영향력 또한 인간의 감당할 수 없는 자연신보다 인격신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이 신보다 우월하다는 철학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런데 사실 철학적 ‘사색’이 시작된 건 그보다 이전이었다. 이미 <리그베다> 시대에 종교적 의식 중심에서 벗어나 사색을 중시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불필요한 제사의식을 행하거나 공물을 바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아는 지식만 많으면 뭐해 뭐든 곱씹어 생각해 봐야지…’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 집단이 형성되어 숲 속으로 들어가 고행하며 사색적 철학을 추구했다. 그들의 철학이 일부 <베다>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다가 <아란야카> 그리고 앞으로 소개될 <우파니샤드>에서 무르익은 셈이다. <아랸야카>와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이란 의미에서 ‘베단타’라고 부른다.
자연인에 의한, 자연인을 위한 <아란야크>는 속세를 버리고 홀로 지내는 자를 위한 것으로 ‘산야사’를 중시한다. ‘산야사’란 힌두교에서 말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의 유행기로, 속세(가족, 재산)를 버리고 구걸하는 삶을 살며 영혼과 세계를 바라보는 성자가 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베다>부터 인도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이 <아란야크>에 이르러 비로소 ‘속세를 버린다’는 개념이 나온다. 비록 나처럼 소소한 것에 매우 연연하는 사람은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