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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ET]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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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로 <테넷>을 세 번째 봤습니다.

지난주는 사실상 '테넷 위크'였습니다. 첫 번째는 와, 두 번째는 뭔가 느낌이 올듯 말 듯 , 세 번째는... 어럽쇼. 뭐가 뭔지 더 헷갈립니다. 난해하긴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부로 들어가 하나씩 뜯어볼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할까요? 마치 머리 한 귀퉁이가 지잉 떨리는 느낌, 이십여 년 전 문과로 간 뒤 의절한 몇몇 두뇌 세포들과 길 가다 상봉한 느낌인데, 어딘가 분명히 잘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별 관심 없이 긴 세월 동안 각자 잊고 지내다가 이제야 갑자기 마주쳐 아우성, 야단법석을 떠는 것만 같네요. '나도 한때 널 좋아했던 적 있어...' 하지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인터스텔라> 이후 오랜만이네."



어쨌거나 하나도 이해 안 되는 거 빼고는 너무 재밌었습니다.

어떤 지적인 재미 이전에 오락적인 재미도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제 생각엔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어렵다, 어렵다 하니 너무 눈에 힘을 주고 보다 보면 피곤해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도 마치 감독의 생각을 말하듯, 초반에 이런 대사가 있죠.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사실 살을 발라 뼈만 남겨(복잡한 배경과 상황 설정을 잠시 제쳐) 두고 본다면, 결국 시간 여행으로 꿀 빨던 악당을 제거하고 세상의 종말을 막는다는 얘기인데, 결국 시간을 순행, 역행하며 세상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시간을 순행, 역행하며 세상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놀런 요리 연구소'에서 순살 많이 새롭게 개발한 소스로 버무려 우리에게 색다르고 남다른 맛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물리학 이론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이 영화의 큰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그걸 이해하는 시각에서 영화를 감상하면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맛볼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 영화를 소화하기 위해 관객이 반드시 언급된 물리학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터스텔라>에선 그런 열풍도 불었고, 그건 관객이 영화를 보러 가는 많은 이유와 동기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영화감독은 과학자가 아닐뿐더러 근본적으로 어떤 과학 이론을 설파하려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스토리텔러, 이야기꾼으로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남다르게 표현해낼까 항상 고민하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경우 그 활로를 과학에서 자주 찾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가도 비슷한 고민을 하죠. 그럴 경우, "소설적 소재의 미래는 과학이다."라고도 표현하는데, 달리 말하자면 "과학을 소설 속 이야기에 접목할 경우 그만큼 기존의 것들과 남다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존과 유사하고 평범한 이야기는 눈에 띄기가 쉽지 않습니다.



확실히 놀런 감독의 작품은 특유의 사실적 액션 묘사와 더불어 그러한 과학 소재의 채용이 시종일관 힘을 발휘합니다. 같은 걸 낯설게 하고, 관객의 흥미를 집중시키며 시선을 강탈합니다. 특히 제가 감탄하는 건, 이런 소재를 상업 영화로 녹여내 풀어내는 현란한 솜씨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것이 걸린 블록버스터의 메가폰을 잡은 흥행 감독으로서 부담감이 있을 테니까요. 제멋대로 표현하자면 이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서사형 SF의 대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간혹 감독이 하고 싶은 예술과 관객이 원하는 영화 사이에 괴리감을 느끼는데, 놀런 감독은 그 사이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적절히 잘 해내며 대개의 경우 사람들을 만족시킬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항상 그런 점에 대해 몇 수 배우며 (어려운 건 어렵다 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번 영화 <테넷>을 놀런 SF 레시피 중 최고의 역작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인셉션>처럼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느낌이거나 <인터스텔라>처럼 어떤 거룩한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전화번호를 연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한 세 번쯤 보다 보니, 그래도 중요한 건 순행과 역행이니까 제목만큼은 한글로 '테넷'이라고 쓰는 대신,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영어 'TENET '으로 써야 제맛일 것 같긴 합니다.



한 가지 눈길을 끈 건, 주인공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덴젤 워싱턴 아들이라는 겁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직도 <이퀄라이저>라며 여기저기 복수를 하고 다니는데, 아들도 피는 못 속인다고 큰 영화의 주연을 맡았네요. 미식축구 선수였다는데, 아버지보다 키나 덩치도 훨씬 작지만, 꽤나 이상한 몸짓에 폴짝폴짝 뛰어다녀 자꾸 볼수록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배우입니다. 솔직히 부자가 별로 닮은 구석이 없어서 좀 놀랐죠. 이 와중에 그(175cm)와 키다리 여배우 엘리자베스 데비키(190cm)를 매칭 시킨 건, 매칭 사이트 참사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신선한 캐스팅이 아니었나 평가해 봅니다. 시종일관 (역행으로) 주인공에게 감정 몰입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요, 저도 그런 일로 어릴 적에 상처 좀 받았던 적이 있죠. 하지만 좀 작으면 어때요. 주연, 프로타고니스트(주창자)인데. 아 참, 젊은 뱀파이어(로버트 패틴슨)도 이젠 꽤 멋진 배우로 성장했더군요.




또 하나, 63세(1957년생)의 인도 여배우 딤플 카파디아도 당연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테넷>에 출연했습니다. 그녀는 73년 데뷔해 <루다이(1993년)>, <파인딩 패니(2014년)> 등 수많은 영화에서 연기력을 인정받고 수상 경력도 화려한, 인도에서 꽤 명망 높은 베테랑 배우랍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에 자국 배우가 출연했다는 소식에 코로나 사태가 심각한 중에도 인도 영화팬들은 크게 반색했죠.


벌써 세 번이나 봤으니 충분히 즐거웠고, 아마도 당분간 <테넷>은 그만 덮어둘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직 많지만, 제가 영화를 보며 물리학을 배우려는 건 아니니까. 돌팔이 의사처럼 열었던 배를 대충 닫으며 이렇게 말하죠. "이쯤 해서 그만 덮어두자."

늘 그렇듯 다시 볼 기분이 드는 날이 있을 겁니다. 역시 문과 다운 소리일지 모르지만, 사실 바로 통찰할 수 없는 것도 한동안 묵혔다 보면 눈에 들어올 때가 있거든요. 아니면 말고. 게다가 세상에 봐야 할 건 많고, 나름 매일 찾아봐도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니까. 순행과 역행 사이에만 갇혀 있을 순 없겠습니다.


다만, 아직 안 보셨다면 어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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